[김미월의쉼표] 젊고 아름다운 말

2023. 7. 21.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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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입구에서 거리로 나서려는 순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 없이 맞을 만한 비가 아니었고 하필 내게는 우산이 없었다.

우산을 가진 사람들이 위풍당당하게 거리로 내려서는 것을 나는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반소매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아이 엄마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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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입구에서 거리로 나서려는 순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 없이 맞을 만한 비가 아니었고 하필 내게는 우산이 없었다. 그나마 환승할 버스 정류장이 바로 몇 발짝 앞이니 그리로 뛰어가면 되겠다 싶어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한 여자가 손에 시장바구니를 들고 품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채 서 있었다.

나야 후닥닥 뛰어가면 그만이지만 아이 엄마는 그럴 수도 없을 텐데 어쩌나. 내심 그가 걱정되었다. 우산을 가진 사람들이 위풍당당하게 거리로 내려서는 것을 나는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반소매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아이 엄마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저는 집이 바로 앞이에요. 아이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 아니에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여학생이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저는 완전 젊잖아요.

어쩌면 말을 저리도 예쁘게 할까. 그냥 젊은 것도 아니고 완전 젊다니. 아이 엄마에게 떠넘기듯 우산을 건네고 빗속으로 뛰어드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생일 때였다. 엄마와 함께 설악산에 올랐다. 애초의 계획은 당일 하산이었는데 엄마가 예상보다 너무 힘들어해서 자주 쉬다 보니 정상에 닿기도 전에 해가 저물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숙박 가능한 산장이 있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두 사람 잘 자리가 없으랴 싶었다. 그러나 웬걸, 빈 자리가 전혀 없었고 정해진 인원 외 수용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망연자실하여 창밖을 내다보는데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더는 움직일 수 없다며 마룻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할 때였다. 등산복 차림의 청년 두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희가 예약한 자리에서 주무세요. 저희는 지금 하산해도 됩니다.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이 시간에 하산을 어떻게 해요? 비도 오는데. 청년들이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저희는 아직 젊잖아요. 그러고는 우리가 만류할 틈도 없이 산장 출입문을 열고 빗속으로 나가 버렸다.

그때도 그 젊다는 말이 참 예쁘게 들렸는데. 사실 젊기로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내가 그들보다 더 젊었을 텐데. 약자를 배려하면서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는 ‘젊다’는 말은, 그 말을 거침없이 꺼내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젊고 아름다운가.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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