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차도서 목숨 구한 의인... 미처 못 구한 ‘다른 분’ 생각에 자책했다

오세운 2023. 7. 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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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설비사 한근수씨, 사고 후유증으로 입원
탈출 중 차에 갇힌 운전자 구조 활동 펼쳐
"구조 안 된 운전자 생사 몰라 가슴 아파"
21일 오전 충북 괴산군에서 만난 한근수씨가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괴산=오세운 기자
"자꾸만 그때 생각이 나고 마음이 아픕니다. 왜 제가 더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못했나... 후회가 돼요."

한근수(57)씨는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 침수 사고 당시 구사일생으로 현장을 빠져나온 생존자다.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려웠던 탈출 순간에도, 그는 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여성 운전자를 구조했다.

목숨을 던져 다른 이의 목숨을 구한 한씨의 행동은 마땅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지만, 지금 그는 자책을 하고 있다. '한 명을 더 살릴 수도 있었는데...'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근수씨가 기억하는 '그곳, 그 순간'

21일 한씨는 충북 괴산군의 한 병원 인근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침수 사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씨는 사고 후유증으로 온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당시 탈출과 구조 때문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오른손을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오송 참사 생존자 한씨의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 있다. 양쪽 팔에는 치료를 위해 주사를 맞아 거즈를 붙였다. 괴산=오세운 기자

괴산 토박이 한씨는 타일을 설치하고 욕실 리모델링 일을 20년 넘게 한 기능공이다. 사고 당일인 15일 오전에도 수도 배관 마감공사를 하기 위해 괴산에서 오송으로 가던 중이었다. 지하차도로 물이 밀려오기 불과 몇 십 초 전까지도 그는 전혀 사고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지하차도였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고가 벌어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지하차도 중간쯤을 지날 때 물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물 때문에 차가 앞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차를 빨리 몰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하지만 앞에 차 세 대가 멈춰 있었고, 옆 차선에서도 버스가 멈춰 섰다. 9명의 사망자가 나온 바로 그 747번 버스다. 그걸 본 한씨는 차를 버리고 탈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차에서 내려 중앙분리대 위로 올라타 탈출하던 도중, 한씨는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구조를 요청한 여성 운전자 A씨를 발견했다. 한씨는 옆 차 지붕에 올라타 창문으로 A씨를 끌어냈다. A씨와 함께 중앙분리대로 올라간 한씨는 또 다른 여성 B씨가 차 안에 갇힌 장면을 목격했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한씨는 B씨를 구하는 장면을 말하면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차와 차문 사이에 발목이 끼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제가 문을 당기고 차를 밀어 겨우 발목을 빼고, 차 뒷문을 열어 탈출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겁에 질려서인지 운전석에서 움직이질 못하시더라고요."

그러나 물살은 이미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한씨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단다. B씨의 차는 이내 지하차도 안쪽으로 떠내려 가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은 계속 이어졌다. 먼저 구조한 A씨와 함께 중앙분리대를 타고 탈출하던 중, A씨가 거센 물살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A씨가 지하차도 밖으로 탈출하신 걸 발견했다"며 안도했다. A씨는 지하차도에서 3명을 구한 의인으로 알려진 증평군청 공무원 정영석씨에 의해 구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사가 몸과 마음에 남긴 상처

21일 오후 오송 지하차도 침수 생존자 한씨가 폐차장에서 자신의 트럭을 찾았다. 침수로 트럭(왼쪽 사진) 앞 차체 부분이 찌그러지고 들려 있고 내부(오른쪽)는 흙탕물로 뒤덮여 어질러져 있다. 한근수씨 제공

참사에서 생존한 한씨는 아직도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를 생각 안 하려고 해도 문득문득 떠오르더라고요. TV에서 그 뉴스가 나오면 숨 쉬는 게 답답해져요." 한씨는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사고 전에 신고가 들어와 대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왜 통제가 안 된 건지 의문"이라고 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일상회복은 막막하다. 늘 작업 현장을 함께하던 1톤 트럭과 작업용 공구들이 망가져 당장 밥벌이가 어렵다. 고3 막내딸 학비를 생각하면 일을 오래 쉬긴 어렵지만, 어떻게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씨는 사망자들 얘기가 나오자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떨었다. "가슴이 아픕니다. 유족 분들이 하루빨리 마음을 추스르시길 바랍니다." 그는 스스로를 언론에 나온 다른 의인처럼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나 몰라라 가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괴산= 오세운 기자 cloud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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