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 자본주의’에서 분투하는 2030 여성 다룬 드라마
<가슴이 뛴다>(KBS2)는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옥택연, 원지안의 호연이 돋보이고, 틀을 깬 설정이 신선하다.
드라마는 역전된 구도를 선사한다. 가령 뱀파이어 ‘선우혈’(옥택연)과 ‘주인해’(원지안)가 엉겨 붙었을 때, 목을 문 것은 주인해다. 즉, 사람이 뱀파이어를 문다. 그뿐인가. 선우혈의 피를 노리는 뱀파이어 헌터 가문이 있다. 선우혈은 뱀파이어 헌터에게 쫓기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윤해선’(윤소희)의 환생을 기다리며 인간이 되려 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100년간 잠을 잤지만, 딱 하루 먼저 주인해가 관 뚜껑을 여는 바람에 선우혈은 반인 반뱀파이어가 된다.
드라마는 장르물의 공식을 완전히 깬다. <드라큘라>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트와일라잇> 등 뱀파이어는 귀족이거나 부르주아였다. 꼭 뱀파이어가 아니어도 <별에서 온 그대>(SBS) <도깨비>(tvN)처럼 오래 산 남자는 죄다 부자였다. 그런데 선우혈은 가난하다. 하긴 오래 살았다고 다 재테크에 성공하긴 힘들다. <별에서 온 그대>나 <도깨비>의 주인공들은 이지에 밝고 운도 좋았다. 집사들의 실력도 뛰어났으며,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칠 만큼 집사 집안의 관리가 철저했단 뜻이다. 선우혈은 100년간 잠을 자느라 집사 집안 관리가 안 되었고, 재산은 흩어졌다.
선우혈 주변 인물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이들은 애초부터 돈이 없었다. 돈이 조금 모이면 뭘 하다 망하거나 빚만 늘어나는 식으로 100년을 살아왔다. 시초 축적이 없었던 서민에게 자본주의 100년의 세월은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진 시절이다. 매혈도 금지되고, 폐회로텔레비전(CCTV)과 소셜미디어(SNS) 등 감시가 촘촘해져 직접 흡혈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한 팩에 10만원이 넘는 헌혈 피를 불법유통으로 사 먹어야 한다. 집세가 오른다. 옆에 프랜차이즈 가게가 생긴다. 쓸 돈은 늘어나는데, 벌기는 점점 힘들다. 100년 만에 깨어나자마자 쇼핑몰에 들어가 주인해의 카드로 500만원이나 긁어댄 선우혈이 이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손사래를 친다. “형님은 깨어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빚이 500만원이나 생기셨어요? 우리도 다 빚이 있어요. 뱀파이어가 사람 피 빠는 세상이 아니고, 인간이 뱀파이어 피 빠는 세상이라고요.”
자본주의에 피를 빨리기는 주인해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주인해의 전세금을 떼먹은 집주인을 400년 전 윤해선을 공격했던 흡혈귀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곤 몇번이고 “피를 빠는 뱀파이어”라 지칭한다. ‘흡혈 자본주의’에 대해 이처럼 선명한 재현이 어디 있으랴. 선우혈은 피에 대한 갈망은 여전한데다 처음 맛본 인간 음식에 대한 식탐까지 지닌 채, 요구르트 배달, 청소용역 등 “아줌마들이 하는 일”을 전전한다. 사랑에 빠진 주인해의 피를 먹지 않으면 인간도 될 수 없고 곧 죽게 되는데, 주인해와 사랑으로 엮을 만한 ‘신도식’(박강현)은 뱀파이어 헌터 가문의 후손이자 부동산 개발업자다. 과연 최상위 포식자라 할 만하다.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주인해 캐릭터를 통해 현실의 2030 여성을 온전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주인해는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오는” “피 안에 독기만 가득한” 인물로 소개된다. 주인해는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여느 로맨스물 여자주인공과 다르다. 웃지 않는 무표정에, 꽃 배달을 받으면 스토킹으로 신고한다. “가슴 뛰는” 사랑을 위해 100년의 잠을 버텼다는 선우혈에게 주인해는 “내 가슴은 2년에 한번 뛴다. 전세랑 계약직 재계약이 2년에 한번”이라고 답한다. 주인해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결혼 생각도 없다. 남에게 폐 끼치기도 싫으니 내가 날 지키는 방법은 돈뿐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돈만 아는 사람은 아니다. 약자를 위해 나설 줄 알고, 직업윤리가 있으며, 불이익을 당할지언정 할 말 따박따박 하는 사람이다. 드라마는 그가 자신을 지키고 버티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일관되게 보여준다. 이는 영화 <돌연변이>나 드라마 <너도 인간이니?>(KBS2) 등에서 여주인공을 지나치게 돈을 밝히고 영악하며 윤리를 저버리는 파편적인 캐릭터로 그렸던 방식과 매우 다르다. 부자인 신도식의 사랑을 횡재처럼 그리지 않고, 게스트하우스 사업으로 성공해서 보답하려는 주인해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태도도 보기 좋다. 또한 “전생 타령하지 마라, 집착하지 말고 놓아줘라. 난 현생도 버겁다. 이번 생이 처음이자 마지막 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주인해의 말도 수많은 전생 로맨스물에 대한 성찰적 메시지로 새겨볼 만하다.
<가슴이 뛴다>는 ‘흡혈 자본주의’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2030 여성들의 현생을 처음으로 똑바로 비추는 거울 같은 드라마다. 언제나 남성의 판타지로만 존재했던 그들이 이제야 처음으로 “가슴 뛰는” 인간이 되었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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