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인간은 결코 상황을 뛰어넘지 못한다"

허연 기자(praha@mk.co.kr) 2023. 7. 2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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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실험으로 세상 놀라게 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1933~)

우리는 보통 개인이 지닌 성격이나 이성이 상황이나 역할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라 불리는 유명한 심리실험이 있다.

1970년대 초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정상이며 범죄나 약물 남용 경험이 없는 대학생 24명을 모아 '모의 교도소 실험'을 실시한다. 짐바르도는 평범한 대학생들을 스탠퍼드 교도소에 들여보내 절반은 교도관 역할을, 절반은 죄수 역할을 하게 했다. 실험은 일주일 만에 갑작스레 중단됐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교도관과 죄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기 시작하자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가혹행위를 시작했고, 그 방법도 시간이 지날수록 잔인하고 창의적으로 변해갔다.

죄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진짜 죄수처럼 모여서 탈주 계획을 세웠고,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의 가학행위가 점점 심해지자 실험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실험의 결론은 명확했다. 짐바르도는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라는 책에서 "나는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고, 나쁜 시스템과 상황에 저항할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슬픈 결론을 내렸다. 악한 행동은 '썩은 사과'(개인)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처한 상황, 즉 '썩은 상자'가 만들어낸다는 이 실험 결과는 당시 심리학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날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놀랄 만큼 닮은 모습으로 재현된다. 2004년 공개된 포로 학대 사진은 놀라웠다. 벌거벗은 수감자를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그 앞에서 미소를 짓거나, 수감자 목에 끈을 묶어 개처럼 끌고 다니고, 수감자들에게 자위행위를 시키는 여군의 모습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그들이 입대 전에는 신앙심 깊은 평범한 젊은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미군 측은 사태를 서둘러 진화하기 위해 "7명의 나쁜 병사들이 저지른 일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짐바르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때와 마찬가지로 상황과 시스템에 있다고 주장했다. 교도소의 입지, 리더십의 부재, 열악한 근무 환경이 만나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짐바르도는 "이렇게 나약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그나마 멸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건 평범한 영웅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 광기의 현장에서 유대인을 구출하기 위해 애쓴 소수의 독일인이 있었다. 이런 '평범한 영웅들'이 그나마 인류를 유지시켜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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