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여전히 미쳐 있다”···플라스부터 솔닛까지 ‘페미니즘의 지도’[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3. 7. 2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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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비평의 문을 연 <다락방의 미친 여자>
40년 만에 다시 정리한 ‘여성들의 글쓰기’
실비아 플라스부터 리베카 솔닛까지
성·작가·인종 등 다층 모순을 글로 풀어내
미국 현대사와 페미니즘 역사를 한눈에
글로리아 스타이넘(오른쪽)이 1983년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했던 워싱턴 행진 20주년 기념 행진에서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와 함께 걷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전히 미쳐 있는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류경희 옮김|북하우스|616쪽|3만3000원

‘실비아 플라스부터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실비아 플라스가 작품을 발표하고 테드 휴스와 결혼해 ‘문학계의 커플’로 명성을 떨치던 1950년대에서 시작하는 대신, 2017년 1월21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그날은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식을 가진 다음날이었다. “하루 동안 일어났던 시위 중 사상 최대 규모”인 여성 행진이 열렸으며, 여성·인종·이민자·장애인·성소수자·노동자 등 다양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출중한 자격을 갖추고 출마한 여성 대통령 후보자가 상스러운 데다 철저히 부적격자인 남성에게 패배하는 일)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페미니즘 비평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에밀리 디킨슨 등 19세기의 기라성 같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페미니즘 비평 시대를 연 <다락방의 미친 여자>(1974)를 집필한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트럼프 당선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여성들의 행진을 보면서 힘을 보태야겠다고 느낀다. 40년 만에 이들은 다시 뭉쳐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이후를 쓰기 시작한다.

1970년대 뜨거웠던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의 파도는 혐오와 차별의 백래시에 사그라들고 말았나. 그들은 답을 찾기 위해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여성 시인, 소설가, 가수, 철학자를 소환한다. 이들을 통해 1950년부터 2020년까지 70년 동안 이어져온 여성들의 각성과 투쟁, 분노와 갈등, 진보와 후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이 진단하기를,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쳐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저자들은 좌절과 실패의 진혼곡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페미니즘의 쇠퇴와 몰락을 다룬 역사가 아니며, 그런 일과 관련된 페미니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역사도 아니다. … 수세대에 걸쳐 여성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문화적 변혁의 비전을 형성하기 위해 자기 삶의 수수께끼를 타진해왔는지 따져보는 이야기다.”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에이드리언 리치. 민음사 제공

책은 1950년대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오드리 로드부터 1970년대 수전 손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앨리스 워커를 거쳐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토니 모리슨, 글로리아 안살두아, 주디스 버틀러를 지나 21세기의 앨리슨 벡델, 리베카 솔닛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의 삶과 글쓰기를 정교하게 꿰어낸다. 이들의 삶과 글 자체가 미국 현대사와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며, 법적·정치적 영역에서 여성들의 권리 진전을 보여준다.

실비아 플라스는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책의 처음을 여는 것도 플라스다. 플라스의 삶은 “1950년대 순응주의를 반영한 삶과 그것에 반발하는 삶을 살았던 그 세대 젊은 여성들의 혼란을 극적으로 보여”주었고, 플라스가 남긴 작품들은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배양지’가 되었다. “문학계의 마릴린 먼로”라고 칭해지기도 했던 플라스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들어갔다. 똑똑하고 촉망받는 문학도는 여대생을 위한 잡지 ‘마드무아젤’의 객원 에디터로 일하며 스커트나 블라우스를 분석해야 했다. 플라스는 테드 휴스와 결혼해 실비아 플라스 휴스가 됐다. 임신과 출산, 두 아이의 육아는 플라스에게 ‘각성’을 가져왔다. 플라스는 “아내이자 엄마이면서 작가라는 3중의 위협적인 여성이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는 1950년대 여성성의 속박과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휴스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플라스는 분열적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끊기 전 남긴 마지막 원고 ‘에어리얼’엔 플라스가 고통 속에 발견한 새로운 자아가 담겼다. 바로 페미니스트였다.

“내게는 되찾아야 할 자아가 있어. 여왕벌처럼.”

플라스가 1962년 쓴 ‘아빠’는 아버지를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 이미지와 함께 배치함으로써 파시스트처럼 위압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속박을 이야기한다. 사후 1963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자전적 소설 <벨 자>는 1970년대 들어서야 미국에 출간돼 큰 영향을 끼쳤다. “플라스가 살았던 실제 삶보다 그녀의 사후의 삶이 훨씬 더 오래도록 확장됐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녀의 묘비에서 휴스란 글자를 지워버렸다. 실비아 플라스 휴스는 다시 실비아 플라스가 되었다.

같은 시기 에이드리언 리치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들과 함께 잔다”고 이야기하며 ‘며느리의 스냅사진들’에서 가부장제 문화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참고 견디지 마라…만족하지 마라…너 스스로를 구원해라”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말한다. “바라건데 얼음처럼 추웠던 2월의 밤 가스 오븐을 틀었던 플라스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리치는 스스로를 구원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반전운동가로 활발한 사회참여를 하며 페미니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니나 시몬. 위키피디아
토니 모리슨(C) Timothy Greenfield-Sanders

페미니즘 제2의 물결에서 흑인 여성들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며 ‘블랙 페미니즘’을 내세웠다. 인종차별에 더해 성차별이라는 이중의 속박에 갇힌 이들은 남성이 주도하던 민권운동에 항의하며 여성의 목소리를 추가했다. 책은 오드리 로드, 니나 시몬, 앨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 등 흑인 여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룬다. 토니 모리슨이 “불후 불멸의” 가수라 불렀던 1960년대 니나 시몬의 활약이 인상적이다. 뛰어난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던 시몬은 인종차별로 웅장한 콘서트홀에서 클래식을 연주하는 대신 바에서 재즈를 즉흥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시몬은 재즈, 블루스, 팝, R&B, 컨트리에서 브로드웨이 쇼 곡까지 광범위한 음악을 소화했다. 시몬이 남긴 가장 뚜렷한 족적은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을 노래한 곡들이다. 불같은 성격이었던 시몬은 마틴 루서 킹이 감금되고 흑인 민권운동가가 살해되는 사건을 보면서 분노를 음악으로 쏟아낸다. 최초의 민권운동 노래 ‘망할 미시시피’에 이어 ‘해적 제니’ ‘힘을 빼고’ ‘네 여자’는 “인종의 성 정치에 관한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1965년 발표한 ‘네 여자’는 서로 다른 피부색을 한 네 여성의 이야기를 독백으로 노래하며 흑인 여성들이 처한 다양한 고통을 그려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위키피디아
오드리 로드가 ‘여성은 강력하고 동시에 위험하다’라는 글자가 쓰인 칠판 앞에 서 있다. 로드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2002)의 한 장면.

1970년대 글로리아 스타이넘, 베티 프리단, 케이트 밀릿, 오드리 로드, 앨리스 워커 등 굵직굵직한 페미니스트들이 남긴 글과 활동뿐 아니라 이들의 관계, 갈등, 협력 또한 상세하게 그려낸다.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에서 그려진 안티 페미니스트 필리스 슐래플리와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 페미니스트 사이의 갈등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페미니즘 잡지 ‘미즈’를 창간하며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다른 급진적 페미니스트로부터 “CIA에 협력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공격을 받기도 했으며, 흑인 작가 앨리스 워커와 백인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여성이라는 단어가 혹시 다양한 배경과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억지로 융합시키는 것은 아닌가”라는 성찰 속에 1980년대에는 정체성 정치가 싹을 텄다. 멕시코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북미 토착 미국인에게 주목했으며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뒤얽힌 관계를 분석하는 ‘교차성’ 개념이 떠올랐다. 1990년대 젠더뿐 아니라 섹스 또한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가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주디스 버틀러 등 퀴어 이론가의 등장은 여성운동 흐름을 재설정했다. <펀 홈> <당신 엄마 맞아?>를 쓴 앨리슨 벡델부터 비욘세, 리베카 솔닛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1998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페미니즘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이 시기상조이며 현실을 왜곡한 것이었음을 증명했다.

<펀홈>과 <당신 엄마 맞아?>를 펴낸 앨리슨 벡델. ⓒElena Seibert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책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야기로 시작해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힐러리 클린턴이 되기 전 힐러리 로댐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결혼 후 성을 바꾸지 않은 것이 남편 빌 클린턴의 정치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이름을 바꾼다. 때론 현실에 타협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성차별과 미소지니”가 ‘미국의 풍토병’이라 비판했다. 낸시 펠로시는 2020년 2월4일 미 국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대통령 연설문을 찢어버린다. 트럼프는 “미친 낸시”라고 그녀를 비난했다. 저자들은 말한다. “그녀는 타당한 이유로 여전히 미쳐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야기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인권의 진전과 퇴보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이 책은 유효하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미투 운동,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등장했던 구호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등이 누구의 입에서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흥미롭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고 “젠더 갈등”만 있는 21세기 한국, 한국 여성들도 “타당한 이유로 여전히 미쳐 있”지만 책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글과 삶은 분노와 ‘광기’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며, 그 힘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기획·연재 |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c282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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