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는 ‘가짜 연기’라는 오만한 표현으로 어떤 연기 철학을 말하고 싶었을까[위근우의 리플레이]

기자 2023. 7. 21.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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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연기’ 기왕 말 꺼낸 김에…예술에 대한 ‘진짜 논쟁’ 볼 수 없을까
지난달 27일 연극 <나무 위의 군대> 기자간담회에서 오랜만에 복귀하는 연극 무대에 대한 소감을 밝힌 손석구. 이 자리에서 언급된 ‘가짜 연기’ 발언이 논란의 시발점이 됐다. 연합뉴스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의 다른 이름은 반백수인데, 덕분에 낮에 집에서 TV를 보는 시간이 많다. 칼럼 소재를 위해 최근 드라마를 보기도 하지만, 채널을 돌리다가 김수현 작가의 예전 작품 재방송을 하면 봤던 작품, 봤던 장면이라 해도 또 본다. 요즘 자주 마주치는 건 1996년 KBS에서 방영했던 <목욕탕집 남자들>인데 이 작품을 보다 보면 새삼 자막 없이도 드라마를 편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현재도 대배우로 꼽히는 이순재뿐 아니라, 목욕탕집 첫째 아들 역할의 장용, 그의 부인 역할을 맡은 고두심 등 주요 배우의 발성이 너무 시원하고 발음도 정확해 가족드라마 특유의 사소하고 옹졸한 다툼도 귀에 쏙쏙 박힌다. 김수현의 작품이 으레 그러하듯 나이가 많든 적든 학력이 높든 낮든 각각의 인물이 서울 사투리로 속사포 같은 대사를 말꼬리 흐리는 법 없이 주술 호응 딱딱 맞춰 청산유수로 쏟아내지만 그것이 인물과 상황의 현실감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내 일상에서 마주치는 목욕탕 주인의 행태와 얼마나 닮았느냐보단 그들이 재현하는 특정 시대 사회상과 가족 내 갈등이 삶의 보편성과 가치를 얼마나 드러내느냐에 있었으므로.

조금 엉뚱하지만, 최근 논란이 되었던 배우 손석구의 ‘가짜 연기’ 발언을 듣고 <목욕탕집 남자들>의 연기가 떠올랐다. 손석구는 지난 6월27일 연극 <나무 위의 군대> 기자간담회에서 과거 자신이 경험한 연극에 대해 “사랑을 속삭이라고 하는데 그럼 마이크를 붙여주던지, 가짜 연기를 왜 시키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그만두고 영화 쪽으로 갔다. 다시 연극을 하면서 내가 하는 연기 스타일이 연극에서도 되는지 보고 싶었다”고 오랜만에 복귀하는 연극 무대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무엇을 의도했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다. 집안의 가부장들을 향해 작게 구시렁대는 혼잣말도 시청자들에게 또박또박 전달하던 <목욕탕집 남자들>의 강부자, 고두심, 윤여정 등의 연기는 그럼 가짜와 진짜 어디 즈음에 있을까. 손석구의 발언이 과거엔 가짜 연기에 대한 요구라 느꼈지만 타 매체 연기를 하며 그 의미를 이해해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미였다면 부연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고, 많은 이들이 이해했듯 실제 현실에서 속삭이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는 무대 연기에서의 리얼리티에 대한 도발적 질문이라 해도 ‘가짜’라는 표현은 과도하고 독선적이다. 해당 소식에 대한 배우 남명렬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오만하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반대로 연극인의 입장에서 하나의 장면을 몇개의 쇼트로 분해해 연기한 뒤 편집으로 연결하는 영상 매체의 방법론을 ‘가짜’라 부른다면 그 역시 오만한 것이듯.

최근 논란이 된 발언…연극에 재도전하며 밝힌 포부였는지, 무대 연기의 리얼리티에 대한 도발적 질문인지 설명 부족해
혼잣말도 또박또박 전달하던 ‘목욕탕집 남자들’의 연기도 가짜였을까…남명렬은 “진짜 연기를 규정하는 자체가 어불성설” 지적
‘오만한 발언’과 ‘선배의 비판’이라는 갈등 구도 소비를 벗어나, 예술의 목적과 책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대화를 보고 싶어

지난 7월18일 다수 매체가 ‘가짜 연기’ 논란에 대한 사과나 해명을 기대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 시즌 2 제작발표회 현장에선 결과적으로 어떤 대응도 없어 그것대로 화제가 되었지만, 오만함에 대한 해명이 이 논란의 끝이어선 곤란하다. 태도 문제와 같은 논란의 요소를 걷어내면 문제 제기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의 물꼬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연기의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은, 과거 김수현 드라마의 배우들이나 MBC <하얀거탑>에서의 김명민처럼 다분히 극적인 연기로 그럼에도 시청자가 그 허구를 믿게끔 만든 작품들과 소위 자연스러운 연기와 일상적인 대사가 진정성 있는 재현으로 받아들여지는 최근의 흐름을 비교해 허구로서의 예술은 각각 어떤 방식으로 삶의 진실을 재현할 수 있는지 질문해 볼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애초에 일방적이고 오만한 기준으로 특정한 역사와 맥락을 지닌 연기 형식을 가짜로 규정하며 소통을 막아버린 건 정작 손석구 본인이다. 그럼에도 남명렬은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을 하는 와중에도 대화의 맥락을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연기는 허구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일진대 진짜 연기가 무엇이라 규정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진짜 같지 않은 연기는 가짜라는 규정에 대해 과연 허구로서의 예술에서 진짜는 무엇일 수 있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느냐는 질문. 어차피 엄격히 따지면 현실만이 진짜고 연기는 어떻게 하든 가짜다. 그렇다면 연기가 현실의 모습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상을 제공할 때 진짜에 가까워지는 것인가, 파편적이고 우연적인 현실 안에서 현상의 본질을 읽어내 전달하거나 폭로하는 것이 진짜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 근본적으로 문화적 관습의 도움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연기에서 출발해 최근의 한국 드라마, 영화의 대사, 세계에 대한 해석 방식까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예술의 목적과 책무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대화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현재까진 요원해 보인다.

가능한 논의의 갈래를 고민하기보단, 손석구의 오만함으로 시작된 논란에 대한 남명렬의 온당한 지적까지 같은 수준의 논란으로 묶어 갈등 구도로 소비해버린 연예 매체들의 책임이 작지 않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책임은 손석구에게 있다. 논란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 오만함에 의한 논란은 적절치 못한 표현에 대한 사과로 깔끔하게 매조지할 일이다. 아직 그조차 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적어도 해당 발언이 아무 생각 없이 던져진 게 아니라면, 잘못된 단어를 골라 불거진 오해를 바로잡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좀 더 명료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연예인에게 요구하는 공인의 자세 따위가 아닌,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온 진지한 예술가로서의 책임감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것 없이 ‘가짜 연기’ 같은 과격한 표현을 썼다면 이미 더없이 무책임하고,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면 자신이 배우 정체성을 걸고 던진 공적 발언의 파장을 바로잡는 게 책임감 있는 태도다. 다른 동료 예술가가 젊은 스타 배우를 공격했더라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논쟁적으로나마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이번 <D.P.> 시즌 2 제작발표회에서 그는 시즌 1에서는 각 신에 맞는 연기를 하며 어떤 캐릭터가 나오는지 봤다면 이번 시즌에선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표현해보고 싶다고 했다. 전자가 부분의 합으로 인물을 구성한다면 후자는 합으로서의 인물로 특정한 부분을 강조하는 것에 가깝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이처럼 같은 매체, 심지어 같은 작품에서도 인물에 대한 접근과 연기의 방법론은 변화할 수 있다.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에선 미리 패를 공개하고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연기를, JTBC <나의 해방일지>에선 정보값을 최대한 숨기고 각 신을 통해 조금씩 캐릭터의 실체를 드러내며 완성하는 모습을 보여준 손석구가 연기에 대한 특정한 도그마에 빠졌으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그가, 왜, ‘가짜 연기’ 같은 독선적 표현을 썼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단순한 말실수 이면에 그가 진정 양보할 수 없는 배우로서의 오만한 믿음은 무엇일까. 알맹이 없이 변죽만 울리는 논란 대신 예술에 대한 진짜 논쟁을 보고 싶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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