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12. 이름은 같지만, 같은 산이 아니랍니다-삼척 쉰움산에서 만난 운해(雲海)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씩 다녀온 산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아니, 똑같은 산을 뭐 볼게 있다고 그렇게 자주 올라갑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씩 웃으면서 건네는 말.
“이름은 같지만, 절대 같은 산이 아니랍니다.”
그렇다. 산은 매일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만, 똑같은 모습으로 산객을 맞는 경우는 없다.
사시사철, 철마다 산의 생김과 분위기가 다르고, 산행 당일의 날씨에 따라, 또 시간에 따라서도 산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진다.
아직 잔설이 듬성듬성 남아있는 산비탈에서 새봄의 전령사,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신록이 무성하고, 단풍이 불타듯 요란을 떨더니 궁극에는 앙상한 가지에 흰 눈을 뒤집어쓴 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는 모습을 산은 오롯이 담고 있다. 비 오는 날, 안개 낀 날, 눈 내리는 날, 흐린 날, 화창하게 맑은 날 등 산행 당일의 날씨에 따라서도 시시각각 또 다른 풍경이 더해지니 요술세상이 따로 없다.
한번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스산한 늦겨울 아침에 망설이다가 “우중 산행을 한번 즐겨보자”고 마음 먹고 우비 등을 챙겨 집을 나섰는데, 그리 높지 않은 산에서 구름바다, 운해(雲海)의 장관을 만나는 행운을 잡았다.
그날 필자가 오른 산은 삼척시 미로면에 있는 쉰움산(五十井山). 쉰움산은 지난 10년 넘는 기간 동안 필자가 횟수를 셀 수 없이 오른 산이다. 근동에 있다는 이유로 단골손님처럼 1주일이 멀다고 쉰움산을 찾아간 때도 있었으니, 이제는 계절마다 산이 어떻게 변하고,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이 어떻게 바뀌는지, 눈을 감고도 예측하고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훤하지만, 그날 쉰움산은 마치 처음 만나는 산처럼 생경했다.
운해는 기상 전문가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기상 현상이라는 점에서 산에서 구름바다 장관을 만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더욱이 연출 시간도 1∼2시간에 불고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오랜 산행 시간과 비교하면 거의 찰나의 예술에 가깝다.
그런 운해를 해발 670m에 불과한 삼척의 쉰움산에서 목도하게 됐으니, 흥분이 남다른 것은 당연지사. 비 내리는 날 아침에도 산행을 결행한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혹시라도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운해가 걷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앞세우고, 산비탈 등산로를 거의 뛰다시피, 기다시피 발걸음을 재촉했다.
운해를 발아래 거느린 쉰움산 정상은 별천지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파도치듯 펼쳐진 거대한 구름바다뿐. 멀리 동해바다와 삼척·동해 시내는 물론 산 아래 가까운 산골 마을도 모두 흰 구름바다에 잠기고, 몇몇 높은 산봉우리만 보석처럼 구름 사이로 삐죽이 머리를 내민 형상은 산객의 넋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가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그날 구름바다 위에 서 있는 쉰움산은 정상의 바위며, 소나무 한 그루까지 더 없는 신비감을 자아냈다. 마치 선계의 신선이 허공에 거대한 도화지를 펼치고, 일필휘지로 수묵화를 그린 듯, 눈에 들어오는 사위의 모든 풍경이 예술 작품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구름바다가 눈앞에서 머문 시간은 불과 1시간 30분 남짓. 시간이 지나자 일렁이는 구름 물결이 언뜻 고산 위로 일어나 흩어지면서 운해의 장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뜻 밖에 장관을 감상한 흥분과 기쁨을 간직한 채 하산하던 중 쉰움산 중턱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을 만났다. 아직 산비탈을 오르는 힘겨움과 싸우고 있는 그들은 방금 전 까지 쉰움산 정상에서 그런 대자연의 걸작이 연출됐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한두 시간의 시간 차가 결국 운해를 만나는 행운의 차이를 가른 것이다. 물론 그들이 구경하는 쉰움산은 조금 전 내가 만나고 온 운해와는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설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서둘러 하산한 내가 그들 눈에는 안타까운 존재로 비칠 것이다. 그래서 산은 같은 이름이로되,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산객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아마도 새벽녘이나, 저녁 어스름에, 단풍철에, 또는 눈 쌓인 겨울산에서 운해를 만난다면, 그 느낌은 또 다를 것이다. 지난겨울 눈 내린 직후에 오대산 노인봉 정상에서 목도한 구름바다, 운해의 장관도 오래도록 여운이 가시지 않는 감동의 결정판이었다.
매일 올라도 싫증나지 않는 산, 그것은 다른 산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 사람 간의 관계도 그와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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