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제로, 남 탓, 정쟁화…윤석열 정부가 재난을 대하는 자세

이주빈 2023. 7. 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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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2023 폭우]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경북 예천군 산사태 피해지역의 임시거주시설인 감천면 노인회관에서 지역 주민들과 대화하고 있다. <jtbc>뉴스 갈무리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지난해 5월22일 한국 방문을 마치고 떠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러한 문구가 적힌 탁상용 명패를 선물했다. 해리 트루먼 미국 33대 대통령이 재임 중 자기 집무실 책상 위에 둔 명패를 본뜬 것이다. 당시 대통령실은 언론에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을 잘 새겨달라는 우정의 조언이 담긴 것 같다”고 선물의 의미를 설명했다.

“당장 대통령이 서울로 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 (16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거기(수해 현장)에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20일 김영환 충북도지사)

그러나 집중호우로 46명(21일 오전 10시 현재)이 숨진 재난 앞에서 이러한 발언만 부각되며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책임지는 자세’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공감과 배려,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무한책임은 보이지 않는다. 사과에 너무나 인색하고 남 탓만 한다”(유승민 국민의힘 전 의원)는 등의 비판이 정치권에서 나온다.

정부가 강제징용 해법을 발표한 뒤 지난 3월12일 대통령실 유튜브 채널에 올린 ‘쇼츠’(Shorts) 영상. 대통령실 유튜브 채널 갈무리

“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

국내 폭우 피해가 확산하던 지난 16일(현지시각) 폴란드 바르샤바 현지 브리핑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당장 대통령이 서울로 뛰어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고 발언해 논란을 불렀다. ‘수해 상황으로 우크라이나 방문 취소 등을 검토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온 대답이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순방 일정을 연장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이 관계자는 “수시로 (대통령이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필요한 지시를 내리는 게 필요하겠다 해서, 하루에 한번 이상 모니터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무책임한 메시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정 컨트롤 타워로서 상식적이지도 않고, 책임 있는 자세도 아니다”라고 했다. 여당 내부에서도 쓴소리가 나왔다. 천하람 국민의힘 순천갑 당협위원장은 같은날 <한국방송>(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의 발언은) 굉장히 잘못된 메시지라고 생각된다”며 “조금 더 낮은 자세로 메시지를 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컨트롤 타워 실종’ 논란에 반박하는 과정에선 “대통령이 일하고 계신 모든 곳이 ‘상황실’이고 ‘집무실’”(17일 박대출 국민의힘 의원 페이스북)이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과거 김기춘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질문에 한 답을 연상케 하는 발언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경북 예천군 산사태 피해지역의 임시거주시설인 감천면 노인회관에서 지역 주민들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살면서 처음 봤다”…윤 대통령의 ‘구경꾼 화법’?

윤 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책임자’가 아닌 ‘구경꾼’ 같은 발언을 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17일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 대통령은 이번 집중호우 산사태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경북 예천군의 이재민을 만나 “저도 어이가 없다. 주택 뒤에 있는 그런 산들이 무너져서 민가를 덮친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지, 몇백 톤 바위가 산에서 굴러올 정도로 이런 것은 저도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봐서 얼마나 놀라셨나”고 했다.

이에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외 순방 중에 수시로 보고받았다는 대통령실 설명과 달리 국내 수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윤준병 민주당 의원은 18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산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한 윤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이면 대통령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을 포기한 것”이라며 “재난 감수성 제로인 윤석열 정부”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8월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반지하 장애인 가족 참사 현장’ 방문 사진을 국정홍보용 카드뉴스로 사용했다가 논란이 일자 사과하며 해당 게시물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의 재난 관련 발언은 여러 차례 논란이 돼 왔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침수로 장애인 가족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침수피해 지역을 방문해 “근데 여기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이튿날인 같은 해 10월30일, 사고 현장을 방문해서도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냐” “압사? 뇌진탕, 이런 게 있었겠지”라고 발언해 유족과 야당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카르텔” “현장 나가라” “전 정부 탓” 호통만

정부·여당이 재난 앞에서도 ‘호통’을 치며 ‘정쟁화’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폭우 대책을 언급하면서 “이권 카르텔, 부패 카르텔에 대한 보조금을 전부 폐지하고, 그 재원으로 수해 복구와 피해 보전에 재정을 투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적 재난을 ‘이권 카르텔’과 연결 지으면서 정치적 갈라치기를 한다는 지적이 여야 모두에서 나왔다. “이권 카르텔 운운하며 정치적으로 (수해를) 이용해서는 안 되고, 현실적인 재원 마련 방안이 필요하다”(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 “대통령 자신부터 재난 대응에 만반의 태세를 갖춰도 모자랄 상황인데, 뜬금없이 범인은 카르텔이라며 또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를 옥죌 궁리만 하고 있다”(김가영 정의당 부대변인) “이권 카르텔은 정치적 용어이고 수해 복구는 절박한 현안으로, 이 두 가지를 엮는 것이 오류”(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라는 지적이 잇달아 나왔다.

윤 대통령은 17일 “국민 안전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집중호우가 올 때 사무실에 앉아만 있지 말고 현장에 나가서 상황을 둘러보고 미리미리 대처하라”는 지시도 했다. “책임자에 대해선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문책이 따라야 할 것”이라는 김기현 대표의 발언(18일 최고위원회의)까지 나오며 일선 현장에만 책임을 물으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유승민 국민의힘 전 의원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일선 공무원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면, 대통령 등 고위 공직자들은 왜 존재합니까?”라고 꼬집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를 찾아 산사태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재난 책임을 두고도 ‘전 정부 탓하기’가 빠지지 않았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19일 서울시 양천구 대심도 빗물터널(지하저류시설)을 방문해 수해 피해가 커진 배경에는 환경부로 물관리를 일원화한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2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지난 정권 중단된 신규 댐 건설 재개하고 국민 안전과 직결된 재해 예방 사업의 환경영향평가를 면제하는 한편 4대강 이후 방치된 지류, 지천 정비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전 정부 탓을 이어갔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는 20일 정책조정회의에서 “재난은 현재 상황”이라며 “정부·여당은 재난 원인을 과거 정부 탓으로 돌리거나, 남 탓을 하지 말길 바란다”고 맞받았다.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20일 충북도청 기자실을 찾아 앞서 오송 지하차도 침수 참사 합동분향소에서 “오송 현장에 일찍 갔다고 상황이 바뀔 것은 없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공감 제로’ 발언…주어만 바꿔 되풀이

‘공감 제로’ 발언은 주어만 바뀐 채 반복됐다.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20일 오전 충북도청 신관 1층 민원실 앞에 마련된 오송 지하차도 침수 참사 합동분향소를 방문해 “(내가) 거기 (사고 현장)에 (일찍)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장 대통령이 서울로 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는 대통령실의 발언과 판박이다.

해당 발언이 논란이 되자 김 지사는 “그분들이 고통을 당하고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는 순간에 내가 거기 있었어야 한다는 자책에서 나온 얘기고, 더 빨리 갔어야 하는데 도정 책임자로서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에서 한 말”이라고 해명했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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