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역할만 한다던 김건희 여사…레드라인 다가온다[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1. 2019년 10월 미군 특수부대가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IS) 수괴를 제거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부통령, 국방장관, 합참의장과 애타게 작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나섰습니다.
그녀는 작전 중 부상을 입은 군견병의 활약을 집중 조명하자고 했습니다. 또 작전 성공 사실을 주목도가 높은 일요일 뉴스쇼가 진행되는 시간에 공개하자고 했습니다. 두 제안은 모두 실행됐습니다.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작전 중 멜라니아의 존재는 올해 2월 트럼프 정부 인사의 회고록을 통해 뒤늦게 드러났습니다.
멜라니아 여사가 실제 국정에 관여했지만 백악관은 이를 철저히 숨겼습니다. 백악관은 IS 제거 작전 사진을 공개하면서 의도적으로 멜라니아 여사를 뺐죠. 회고록을 쓴 크리스토퍼 밀러 전 국방장관 대행은 “대통령 부인이 주요 군사작전을 보려 불쑥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언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2. 2020년 8월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보우소나루 여사 계좌로 수상한 자금 8만9000헤알(약 1880만 원)이 입금됐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돈을 건넨 이는 상원의원이었던 장남의 전직 보좌관이었습니다.
브라질 유력 일간지 기자가 대통령에게 ‘영부인 미셸이 돈을 받은 게 사실인가’라고 묻자 그는 “당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싶다. 그래도 되나?”라고 폭언을 내뱉으며 거칠게 대응했습니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임기 중 40억 원 상당의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반지 등 장신구를 불법으로 반입하려다 뒤늦게 적발됐습니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측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영부인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 법에 따르면 대통령과 영부인을 위한 공식 선물도 국가 자산으로 귀속되기에 석연치 않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결국 영부인의 과도한 물욕 때문에 사치품을 들여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 ‘명품 쇼핑’ 논란…입 닫은 대통령실
이 사실을 최초 보도한 리투아니아 패션 전문 매체 주모네스의 11일(현지 시간) 기사에 따르면 김 여사는 경호원과 수행원 16명을 대동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채 명품 편집숍에 갔습니다. 매장 매니저에 따르면 김 여사는 사전 통지 없이 방문했으며 내부를 둘러보는 동안 수행원 10명이 함께 했고 6명은 바깥에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김 여사는 5곳의 브랜드 매장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김 여사 방문 다음날 한국 대표단 몇 명이 옷 가게로 돌아와 추가로 물건을 샀는데, 영부인이 무엇을 샀고 얼마를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해당 언론은 덧붙여 ‘스타일이 매우 중요한 한국 대통령의 아내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의류 살롱에서 쇼핑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현지 언론에서 상세한 보도가 나왔는데, 대통령실은 공식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의혹을 키웠습니다. “가게에서 호객을 했기 때문에 들어간 것”, “구경은 했지만 물건은 사지 않았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해명이 보도되면서 경호원을 대동한 상황에서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라는 비판 여론을 키웠습니다. 결국 또 다른 대통령실 관계자가 나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파장을 덮는 데 급급한 모양새입니다.
김 여사와 관련한 석연치 않은 일은 또 있었습니다. 서울-양평 고속도로가 김건희 여사 일가가 소유한 땅을 지나도록 노선이 변경됐다는 의혹이 일자 6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업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습니다. 원 장관은 “고속도로 종점 부근에 김 여사 일가의 땅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장관직과 정치생명을 걸겠다”고도 했습니다.
원 장관이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낸 것을 두고 이 정부의 실세가 누구인지 보여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8일 CBS라디오에서 “이분(김건희 여사)을 건드리니까 굉장히 민감해서 과잉 반응이 나와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여권 관계자도 “현 정부에서 김건희 여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습니다.
● 계속되는 논란 “고양이 목 방울 달기”
김 여사의 행보가 논란을 빚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한 달만인 지난해 6월에는 김 여사가 봉하마을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대표를 지낸 코바나컨텐츠 회사 전무를 대동했습니다. 민간인인 해당 전무에게 의전, 경호 지원이 이뤄졌습니다. 같은 달에는 역시 민간인 신분인 대통령 인사비서관 부인이 김 여사 지원을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 순방에 동행하면서 대통령 전용기를 이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권 내부에서도 김 여사 행보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김 여사에 대한 윤 대통령의 넘치는 사랑을 잘 알기에 함부로 이 주제를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격입니다.
실제로 지난 대선 때부터 김 여사 관련 업무를 전담할 조직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김 여사가 자신을 보좌할 이들을 추천받고 직접 면접도 봤으나 낯선 이들과 함께 일하는 걸 꺼리는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김 여사는 대선 과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 여사의 행보가 때로는 윤 대통령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는 게 현실입니다.
● 미 백악관은 영부인 비서실장도 임명
미국 퍼스트레이디(영부인)는 법률에 따라 행정보좌관과 비서를 둘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비서실장, 언론 비서, 연설문 작성자 등을 채용합니다. 전속 요리사와 화훼담당자를 뽑는 경우도 있습니다.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 업무를 보좌할 경우 공식적으로 재정 지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여사와 바버라 부시 여사는 영부인 비서실에 20명가량의 비서를 고용했습니다. 현직인 질 바이든의 영부인실에도 10명 내외의 직원이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퍼스트레이디가 재임 기간 각별히 챙기는 사업을 ‘펫 프로젝트(Pet Project)’라고 부릅니다. 낸시 레이건의 마약 금지 캠페인, 바버라 부시의 ‘문맹 퇴치 캠페인’, 미셸 오바마의 비만 퇴치 운동이 이에 해당합니다.
퍼스트레이디는 때로는 국가적 과제를 논의하는 참모 역할을 합니다. 엘레노어 루스벨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를 신장하고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을 강조했습니다. 남편 정책 홍보에 적극적이었던 엘레노어는 12년간 348차례나 기자회견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부인 힐러리 클린턴에게 ‘국민건강보험’ 개정을 맡기면서 국정 운영 동반자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물론 힐러리는 남편의 국정에 지나치게 깊이 관여해 세간에서 ‘두 명의 대통령’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죠.
미국의 영부인들은 이처럼 자신의 행보나 정책 목표를 공개하고, 국민과 언론을 통해 이를 평가 받습니다. 이에 비하면 김건희 여사의 행보는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비공식적입니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 따라 영부인을 보좌할 제2부속실을 없앴습니다. 제2부속실 폐지로 영부인 관련 공식 조직이 없는 상태입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게 주업무인 제1부속실 행정관들이 김 여사 일정을 일부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과거에 비해 영부인의 역할이나 위상이 훨씬 더 확장되고 있다. 위상에 맞는 공적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라며 “현재 김건희 여사의 행보를 누가 어떻게 관리하는지 모호하기 때문에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상태”라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제2부속실을 설치할 경우 ‘공약 파기’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에서도 제2부속실 부활을 주장하고 있는 만큼 국민께 솔직하게 양해를 구하고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사안입니다. 제2부속실 대신 미국처럼 ‘영부인실’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 여사는 전시 기획 등 본인의 전문 분야를 비롯해 유기견 보호, 발달 장애인 예술가 지원 등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본인의 ‘펫 프로젝트’로 정해 공개 활동한다면 공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거 때는 표심을 의식해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세계적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시대 변화에 맞는 영부인상을 당당하게 구축할 시점입니다.
최 원장은 “영부인 전담 조직이 생기고 보좌진 명단이 공개되면 이들이 해당 분야 전문가인지, 단순 사적 인연으로 임용됐는지 분명히 밝혀질 것”이라며 “공적 시스템 속에서 적절한 지원을 받으면 영부인에게 과도하게 쏠리는 관심도 잦아들게 되고, 이는 결국 대통령의 국정운영 부담을 줄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입니다.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의 품격을 높일 해법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지난주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내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메일 empty@donga.com으로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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