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앵커 출신 이민자가 전하는 독일 정착기
3년 전 아이 둘을 데리고 연고 없는 나라로 떠났다. 오늘도 머릿속에 이민을 떠올린 이들에게 도박과도 같았던 이민 생활 정착기를 바친다.
"뭔가를 다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 중엔 제일 노련하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애매한 나이 중엔 제일 민첩하고."(드라마 '멜로가 체질’ 중)
이민을 결심하기 전, 곰 같던 내 몸은 양처럼 쇠약해져 있었다. 방송 전 링거는 필수였고, 호흡기는 미세먼지와 건조한 스튜디오 속에서 상해버렸다. 그러면서도 앵커 자리를 지키기 위해 24시간 공부하고 취재했다. 휴가도 잘 안 갔다. 자정에 퇴근하면 1~2차 회식은 필수 코스였다. 저녁 뉴스를 맡았던 터라 오후 5시에 출근하니 아이들과 저녁 한 끼 제대로 먹을 시간은 없었다. 주말엔 밀린 잠을 자거나 당직 근무를 섰다. 그야말로 K-직장 생활. 이대로 가다간 죽겠다 싶었다.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 속 사자에 쫓기는 누 떼가 마치 내 삶 같았다. 저 중 한 마리가 나일 텐데 방향만 살짝 틀어주면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심 이 구조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자력으론 불가능했다.
반짝이는 기획과 눈부신 아이디어가 장기인 아내가 어느 날 이민을 제안했다. '이민? 그거 신선한데?’ 아내가 던진 화두는 빠르게 머릿속을 장악했다. 무슨 용기인진 몰라도 지금 삶에 들이는 노력이라면 어디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외 생활의 설렘까지 품은 이민은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막상 독일에 와보니 해당 에이전시는 4인 가족을 관리할 역량이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에 우리 가족이 모두 오고 나서부턴 "알아서 하라"는 답변이 늘어났다. 정착 초기,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매일 수백 가지의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에이전시는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러다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전 세계가 패닉에 빠졌고 독일 외국인청도 문을 닫았다. 나도 아내도 멘털 붕괴 직전이었다. 에이전시가 잡아준 집은 너무 비싸고 좁았는데 그마저도 잘못된 계약이었다. 에이전시는 내게 임대인을 소송하라고 부추겼지만 증거는 없었다. 당장 진짜 집주인이 나타났고 우리 가족은 일주일도 안 돼 방을 뺐다.
모든 걸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거주지 문제는 해결했는데 비자가 시급했다. 에이전시가 권했던 어학 비자는 내게 적합하지 않았다. 직접 찾아본 뒤 대학원에 합격해야 받을 수 있는 유학비자로 우선 선회했다. 이마저도 셧다운(shutdown·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일시적 업무정지)으로 물거품이 됐지만. 결국 비자청에 무작정 찾아가 "임시 비자라도 달라"고 사정해 받아냈다. '어떡하지, 한국에 다시 가야 하나?’ 싶었지만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돌아간단 말인가. 더구나 딸아이는 여기서 초등학교 학업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어정쩡했다.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비자가 시급했던 나는 더 적극적으로 대학원에 지원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어학 공부와 대학원 지원에 전념하도록 최대한 배려해줬다. 남은 입학 조건은 독일어 고급 수준의 어학 자격증이었다. 20대 독일 유학 준비생들이 모인 단톡방에 들어가 A부터 Z까지 모조리 물어가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사이 지원 대학 13군데 중 3곳에 합격했다. 상향 지원이었던 함부르크대학교의 저널리즘 대학원도 그중 하나였다. 어학 자격증은 추후 제출하는 조건부 합격이었다. 당장 함부르크로의 이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독일은 이사하기 위해 입사 시험 치르듯 지원서를 넣는다. 자기소개서와 수입, 신용정보를 집주인 내지 부동산과 공유해야 한다. 당시 나는 학생도 아닌 대학원 합격생이었고 독일에선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도 부동산 포털 속 월셋집 후보 수십 곳에 자기소개서와 소득증명서를 적극 넣었다. 처음 정착했던 도시 뉘른베르크에서 함부르크까지는 야간 버스로 8시간이 걸렸다. 집을 보러 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4인 가족이 머물 집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사이에 기적처럼 함부르크에서 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야간 버스에 몸을 구겨 넣고 함부르크로 향했다. 왠지 마음이 가벼웠다. 한국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10개월간 내놓은 집이었다. 동네와 환경, 임대인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숱한 자잘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마침내 계약을 마쳤다.
공부보단 일을 해야 했다. 한국에서 벌어놓은 돈으로 생활하는 건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 적극적으로 현지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팬데믹 상황에서 치른 온라인 면접이 오히려 부담을 덜어줬다. 총 6곳에 지원해 3패 2무,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1승을 거뒀다.
독일의 면접은 한 사람을 깊이 들여다봤다. 내가 뭘 했고, 거기서 어떤 능력을 연마했으며 지원 포지션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따졌다. 여러 시뮬레이션 상황을 설정해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끄집어내는 면접도 있었다. 조직원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성심껏 답했고 매 인터뷰 시간은 최소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였다. 직장을 구하자 비자 문제와 주거지 문제도 차차 해결됐다.
한국인과 독일인, 2개의 정체성
"친구들이 네 겉모습이 달라서 낯설기도 하고 신기해할 수도 있어. 네가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인을 처음 보는 동네 아이들은 네 생김새가 퍽 신기할 거야. 그러니 너도 '친구들이 내게 관심을 갖는구나, 감사하다’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어떨까?"
집에서는 한국어를 쓴다. 아내와 함께 광복절에 왜 태극기를 게양하는지, 명절에는 왜 한복을 입고 설에는 떡국을 먹는지 알려준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정립하고 동시에 독일 시민으로서, 나아가 유럽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틈나는 대로 아이들과 토론하고 대화를 나눈다.
아이들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해나갔다. 특히 큰아이가 대견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독일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현지 정착에 애쓰느라 독일 학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남들처럼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딸아이는 학교에서 최대한 정보를 잘 수집해왔고, 우리는 집에서 머리를 맞대며 나름대로 독일 학교의 각종 행정 업무와 이벤트에 대응할 수 있었다.
"아빠랑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아."
딸아이가 어느 날 무심코 던진 그 말에 그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우리만의 새로운 추억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너무 경쟁에 몰리지 않으면서 놀 때 원 없이 놀 수 있는 환경이 마음에 든다.
속도전 강요 않는 독일
다만 독일 사회는 입시 일변도의 구조가 아니다. 어렵긴 해도, '아우스빌둥’(Ausbildung·직업학교)에 다니다 '김나지움’(Gymnasium·대학 진학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옮겨 대학에 가는 사람이 있다. 굳이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 졸업 후 직업 실습 과정을 거친 뒤 일찍이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도 한다.
남의 삶에 신경 쓰지 않고 개인을 중시하는 분위기 덕분에 아이들은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삶을 설계해나갈 겨를이 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곧장 대학에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갭 이어(gap year)를 갖고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여행을 떠나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학생들도 많다.
딸아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거의 마쳤고, 독일에서 팬데믹 때 공립학교 어학 과정 1년 그리고 함부르크에서 정식 1학년을 다시 다녔다. 1학년만 세 번 한 셈인데 한두 살 터울의 친구들과 격의 없이 잘 지낸다. 비슷한 사례가 워낙 많아서다.
딸아이를 2학년으로 곧장 보내려고 했던 우리 부부에게 딸아이 학교 교장선생님과 학습 코디네이터, 담임선생님이 입을 모아 해준 말이었다. 독일 교육에도 맹점이 많지만 '속도전(戰)’을 강조하지 않는 교육 기조 하나만큼은 "독일 오길 잘했다" 싶게 만들었다.
요즘 한국에서 이민이 떠오른다는 뉴스를 접했다. 가보지 않은 길에 자꾸 눈길이 갈 법하다. 이민 후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내 짧은 경험 중 일부를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한 이유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특히 자기 스스로 충분히 정보를 갖고 준비하지 않으면 남에게 의존하게 되거나 결국 난관에 부닥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민은 마냥 인생의 왕도가 아니다. 하지만 이민이 매력적인 또 다른 선택지라는 건 분명하다. 절망은 선택지가 없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찾아오니 말이다.
독일에는 'Wahlheimat’라는 단어가 있다. 바로 '내가 선택한 고향’이란 뜻이다. 태어난 나라는 선택할 수 없지만 살아갈 나라는 선택할 수 있는 시대다. 삶이 B(birth)와 D(death) 사이의 끝없는 C(choice)라고 한다면, 이민을 고민하거나 선택해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에 조금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선택지가 많고 다양할수록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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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정병진
정병진 독일 IT기업 책임매니저(유튜브 뉴스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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