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숨은영웅] "공산화 막으러" 그리스 내전 이은 두번째 참전…사명은 진행형
"통일이 사명의 완성…통일된다면 韓 대통령이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에 헌화하길 소망"
(아테네=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93) 그리스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장이 한국 파병을 자원했을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꽃다운 나이에 생환을 장담할 수 없는 사지에 가겠다고 어떻게 손을 들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스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4∼1949년 정부군과 공산군 간에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10만∼15만명이 사망한 비극이었다.
당시 내전에선 한국에서처럼 가족마저도 좌우로 갈려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이 때문에 당시 그리스에서는 반공 정서가 매우 강했다.
내전이 그리스 정부군의 승리로 끝난 뒤 다음 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공산주의로부터 조국을 지킨 그리스인들은 공산화 위기에 놓인 한국을 구하러 한국 파병을 앞다퉈 자원했다.
그중 한 명인 드라코스 협회장을 지난달 14일(현지시간)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있는 전쟁 박물관에서 만났다.
그는 "내게 한국전쟁은 그리스 내전에 이은 두 번째 전쟁이었다"며 "내전 당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것처럼 똑같이 싸우러 간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코스 협회장은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사명감을 느꼈고, 그때는 그게 옳다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드라코스 협회장은 1949년 그리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51년 졸업했다. 사관생도 신분으로 내전에 참여한 그는 한국전쟁에는 소위 계급을 달고 참전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그에게도 한국전쟁은 힘겨웠다. 그는 1952년 3월부터 1953년 1월까지 약 11개월간 참전해 임진강 인근 167 고지와 강원도 철원에서 악전고투를 치렀다.
드라코스 협회장은 해가 지고 밤이 되는 게 두려웠다고 했다. 중공군이 밤만 되면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철원에선 우리 고지 반대편에 중공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간격은 1㎞ 남짓이었다"며 "밤마다 격렬하게 돌진해와서 밤이 되는 게 무서웠다"고 했다.
적은 중공군뿐만 아니었다. 문제는 추위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어서 불을 피울 수가 없을 정도의 혹한이었다고 했다.
드라코스 협회장은 "철원에서 머문 두 달 동안 전투가 아니라 추위 때문에 많은 전우를 잃었다"고 회고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그리스는 최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한 육군 1대대와 공군 등 총 1만581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당시 그리스 인구가 불과 750만명이었던 걸 고려할 때 상당히 큰 규모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현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최대 규모의 군인이 해외로 파병됐다고 했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그리스 병사는 186명, 부상자는 610명이었다.
내전으로 다져진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최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그리스 장병들은 이른바 '스파르타 부대'로 불렸다.
그리스를 포함해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다.
하지만 드라코스 협회장은 대한민국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한국 국민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한국인의 위대한 애국심과 근면성, 인내, 목표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는 민족성에 있다"며 "난 한국 국민들을 축하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드라코스 협회장은 "우리가 제공한 건 이렇게 작은데, 결과가 이렇게 크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며 "한국이 발전하는 모습을 직간접으로 접할 때마다 너무 자랑스럽고 감동적"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참전 이유가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말한 그는 자신의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과 북 사이에 그어진 휴전선 때문이다.
드라코스 협회장은 "우리의 사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버렸다"며 "한국전은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평화에 대한 기약도 없이 종료됐고, 양측은 여전히 휴전선에서 상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만일 남과 북이 통일된다면 한국의 대통령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는 "그때가 되면 한국의 대통령이 작은 꽃을 가져와서 그리스군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에 헌화했으면 좋겠다"며 "우리 참전용사들에게 승전보를 갖고 와서 당신들의 사명이 완성됐다고 말해줬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아테네 인근 파파고시에 있는 그리스군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에는 2004년부터 매년 6월 25일이면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가 열린다. 여기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그리스군 18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생존해 있는 그리스 내 한국전쟁 참전 용사 가운데 막내인 그는 20년 넘게 그리스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장을 맡아 그리스와 한국의 우호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육군 소장으로 퇴역한 드라코스 회장은 2013년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그리스 대통령의 내한 당시 한국을 함께 찾기도 했다.
드라코스 협회장은 "우리는 한국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국이라는 국가명도 몰랐다. 당시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게 형성된 양국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것이 내게는 큰 사명"이라며 "그리스 참전용사들이 한국에 가면 고향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한국 국민들도 그리스를 제2의 고향으로 느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리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 정부와 주그리스 한국 대사관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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