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다 큰 아들 지키는 할머니 범고래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3. 7. 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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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 지난 어미 있으면 수컷 상처 35% 적어
자식 통해 유전자 퍼뜨리는 ‘할머니 가설’
여성은 폐경 후 10년마다 손자 2명 더 봐
범고래도 할머니가 무리 이끌면 생존율 높아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범고래. 폐경이 지난 할머니가 다 큰 아들의 먹이를 챙기고 다치지 않게 보살핀다. 위험한 노산을 하기보다 자식을 보살펴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리는 이른바 '할머니 가설'의 예이다./영 엑시터대

다 큰 아들이 맞고 다니지 않는지 늘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엄마가 있다. 딸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과잉 양육에 지독한 편애까지 하는 이 엄마는 바다에 있는 범고래이다. 영국 엑시터대의 다렌 크로프트(Darren Croft) 교수 연구진은 21일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폐경(肺經)이 지난 어미와 사는 수컷은 몸에 상처 흉터가 다른 수컷보다 적었다”고 밝혔다.

수명이 한참 남았는데도 생식 능력이 사라지는 폐경 현상은 포유류 중 사람과 범고래와 같은 이빨고래 5종 등 단 6종에서만 나타난다. 범고래 암컷은 90세까지 사는데 폐경 후 20년을 더 산다. 과학자들은 사람이나 고래 모두 어미가 자신의 생식 능력을 희생하고 대신 자식을 도움으로써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도록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지독한 내리 사랑이다.

◇어미 보살핌 덕분에 상처 덜 생겨

연구진은 50년 동안 미국 북서부 해안에 사는 범고래 103마리를 찍은 사진 6934장을 분석했다. 어린 범고래들은 지상의 육식동물처럼 동년배들과 격렬하게 장난을 친다. 장난이 지나치면 이빨에 피부를 긁혀 깊은 흉터가 남는다. 범고래 엄마는 몸무게가 5톤이 넘는 다 큰 아들을 따라다니며 보살폈다.

연구진은 폐경이 지난 어미와 같이 있는 수컷은 다른 수컷보다 이런 이빨 자국이 35% 적었다고 밝혔다. 어미가 있어도 여전히 새끼를 낳는다면 그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폐경이 지난 어미의 내리사랑은 아들만 향했다. 폐경이 지났든 아니든 어미가 암컷의 흉터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크로프트 교수는 나이든 어미는 무리 구성원들을 잘 알고 있어 아들이 동년배와 갈등을 빚지 않도록 달랠 수 있고, 다른 범고래의 행동에 대한 지식도 동원해 싸움이 생길 것 같은 분위기이면 아들을 그곳에서 떨어지게 한다고 추정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실제 갈등 상황에서 어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겠다고 밝혔다.

그래픽=정서희

◇자식 통해 유전자 퍼뜨리는 할머니 가설

폐경이 지난 범고래 어미의 아들 사랑은 이른바 ‘할머니 가설’로 설명된다. 과학자들은 인간과 범고래의 조기 폐경은 노산(老産)의 위험을 감당하기보다 자식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더 많이 퍼뜨리도록 진화한 결과로 해석한다. 자손을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할머니 가설은 영국 셰필드대의 비르피 루마(Virpi Lummaa) 교수가 2004년 ‘네이처’지에 처음 제기했다. 루마 교수팀이 캐나다와 핀란드 여성 3000여 명을 조사했더니, 여성은 폐경 이후 10년마다 평균적으로 2명의 손자를 더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할머니기 직접 자녀를 낳기보다는 손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줘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이 번성한다는 것이다.

범고래도 마찬가지다. 폐경이 지난 어미는 인간 사회의 할머니처럼 먹잇감이 어디 있는지 무리에게 알려주고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절반 이상 나눈다. 범고래 무리를 폐경이 지난 할머니가 이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크로프트 교수는 수십년간 범고래 무리를 촬영한 영상을 분석해 할머니 가설을 입증했다. 2015년 ‘커런트 바이올로지’ 발표 논문에 따르면 폐경이 지난 암컷이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끈 경우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보다 32% 많았다. 다 자란 수컷보다는 57%나 많았다.

범고래 수컷의 지느러미 흉터. 폐경이 지난 어미와 같이 있는 수컷은 다른 수컷보다 몸에 흉터가 35% 적었다./영 엑시터대

◇폐경 전에도 아들 양육에 번식도 포기

이번 연구는 범고래 어미가 먹이뿐 아니라 아들의 사회생활까지 챙긴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아들이 다치지 않아야 어미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이 2012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은 나이 든 암컷이 없으면 30세 이상 수컷의 사망률이 14배나 증가한다고 밝혔다. 같은 나이 암컷 사망률은 3배 증가에 그쳤다.

또 이번 연구는 범고래 어미의 내리 사랑이 수컷에게만 해당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연구진은 이 역시 범고래 어미가 자신의 유전자를 더 잘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수컷은 무리를 떠나 다른 곳에서 새끼를 낳지만, 암컷은 같은 무리에 머문다. 범고래 어미로서는 아들을 보살피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손자를 키울 걱정을 안 해도 되지만, 딸은 같은 무리에서 손자를 낳아 자원을 두고 다퉈야 한다.

범고래의 지독한 아들 사랑은 심지어 폐경 전에도 나타난다. 크로프트 교수 연구진은 지난 2월 역시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범고래 어미는 다 큰 아들을 챙기느라 새로 자식을 낳지도 못한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1982~2021년 미국 워싱턴주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연안에 사는 범고래 무리에서 암컷 40마리를 추적했다. 수컷을 보살피는 어미는 암컷을 낳은 어미나 아직 출산하지 않은 암컷보다 매년 새로 새끼를 가질 가능성이 50% 이상 낮았다. 다 큰 아들이 동생들이 태어날 기회를 차단한 셈이다.

어미가 다 큰 아들을 계속 양육하는 것은 사냥 때문이었다. 범고래 수컷은 덩치가 워낙 커 먹잇감인 왕연어를 잡기에 동작이 민첩하지 못하다. 어미가 힘들게 잡아 먹여줘야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래저래 범고래 어미는 평생 아들에 매여 사는 셈이다.

참고자료

Current Biology(2023), DOI: https://doi.org/10.1016/j.cub.2023.06.039

Current Biology(2023), DOI: https://doi.org/10.1016/j.cub.2022.12.057

Current Biology(2015), DOI: https://doi.org/10.1016/j.cub.2015.01.037

Science(2012), DOI: https://doi.org/10.1126/science.1224198

Nature(2004), DOI: https://doi.org/10.1038/nature0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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