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즈상 그후 1년]⑤ ‘킬러문항’ 제2의 허준이 등장 막고 있다
필즈상 나왔지만 수학 저변은 여전히 열악
산업·기술 기반인 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부족
박형주 아주대 석좌교수 “대입 제도 바꾸는 결단 필요”
”수능 수학에 서술형 문항 늘려야”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지 1년이 됐다. 허 교수의 수상을 계기로 한국 수학계의 위상이 높아지고,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늘고 있다. 하지만 허 교수 같은 최상위 수학자의 부상과는 별개로 한국 수학이 처한 현실 자체는 여전히 암담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선비즈는 4회에 걸쳐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수학계에 불어온 새로운 변화의 바람과 현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명한다.[편집자 주]
박종일 대한수학회장은 올해 초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수학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한국계 수학자 최초로 필즈상을 받으며 한국 수학계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점에서 나온 말이었다.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으로 축제 분위기였던 상황에서 왜 이런 진단이 나온 걸까. 연구 현장에서 만난 수학자들은 허 교수 같은 최상위 연구자의 연구 성과와 별개로 한국 수학계가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다고 입을 모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다. 수학과를 나온 수학자를 채용하는 산업체나 기업이 많지 않다. 박 회장은 “매년 배출되는 수학과 출신 박사는 100명 정도인데 연구소나 산업체에 자리 잡는 인원은 어림잡아 50명 정도”라며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박사는 많지만, 지원 제도가 없어 시간제 강사나 학원 강사 등 다른 진로를 선택한다”고 이야기했다.
황준묵 기초과학연구원(IBS) 복소기하학 연구단장도 “다음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려면 후학 양성이 절실한데, 가장 큰 문제는 수학자를 위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라며 “중국과 비교해보면 중국은 수학을 연구하는 박사후 연구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데, 한국의 박사후 연구원들은 좋은 직장을 갖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고민이 많다보니 도전적인 연구 자체가 어려운 환경”이라고 말했다.
아예 대학의 수학과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2년 사이에만 해도 광주 조선대가 수학과를 폐과했고, 강릉원주대는 수학과를 물리학과와 합쳤다. 최상위권 대학의 수학과는 매년 입시 경쟁률이 낮아지고 있다. 종로학원이 조선비즈 의뢰로 전국 4년제 대학 수학과 정시 경쟁률을 집계한 결과, 서울대 수리과학부는 2021년 입시 경쟁률이 3.3대 1이었는데 올해는 2.6대 1까지 낮아졌다. 고려대 수학과는 3.9대 1에서 3.6대 1로, 연세대 수학과도 3.9대 1에서 2.9대 1로 낮아졌다.
대학의 수학과는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인 동시에 수학자의 일자리 역할도 한다. 대학 수학과가 사라지는 건 인재 양성 기관과 일자리가 동시에 사라지는 타격을 주는 셈이다. 최영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는 “대학 수학과가 사라지는 건 리더들의 판단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며 “수학이 사라지면 지금 당장은 괜찮아보여도 20년 뒤에는 반드시 후폭풍이 온다. 기초를 안 해놓으면 골탕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수학을 의대를 가기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는 인식도 문제다. 대치동이나 목동 학원가에서는 초등학생에게 중·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다. 의대 입학을 위해 수학을 가르치다보니 수학의 본질인 사고력을 키워주는 건 뒷일이다. 이렇게 수학을 배운 학생들이 성인이 되면 수학을 멀리하거나 수학을 아예 포기해버리는 ‘수포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국내 수학계의 석학인 박형주 아주대 석좌교수는 문제 풀이 중심의 입시 대비형 수학에서 다양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연습이라는 차원으로 수학 교육을 재정립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박 석좌교수는 지난해 교육과정개정 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수능 수학시험에서 킬러문항을 출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최근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한 킬러문항을 처음 공론화한 셈이다. 박 석좌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수능 수학 킬러문항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수학 개념을 이해하는지 테스트하는 게 아니라 변별력을 위해 괴물처럼 꼬아놓은 문제였다”며 “사고력의 확장과는 무관하게 단지 꼬아 놓은 문제를 별도의 훈련을 통해서 대처하는 건 논리적 사고의 훈련이라는 수학 교육 본연의 취지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박 석좌교수는 수능 입시 제도를 바꾸는 것이 수학 교육의 본질을 되찾고, 더 나아가서 제2의 허준이, 제2의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석좌교수는 수능 수학시험에서 킬러 문항 대신 서술형 문항을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기록하는 연습을 하게 하고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는 제도가 필요하다”며 “실수를 하더라도 부분점수를 주는 서술형 문항이 늘어나면 학생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채점의 공정성 문제는 인공지능(AI) 채점 방식을 쓰면 된다는 게 박 석좌교수의 아이디어다. 다른 수학자들도 입시 제도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최영주 교수도 “입시 제도가 다양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학이 현대 사회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제대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얼마 전 세상을 뒤흔든 챗GPT 같은 생성형 AI 기술의 저변에도 수학이 다양하게 쓰인다. 산업 뿐만 아니라 의료계에서도 수학은 중요한 키워드다. 수학의 저변이 약해지면 산업 전반의 경쟁력도 약해질 수 있는 것이다.
김현민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소장은 “AI의 정확도를 개선하는데 수학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IT 기업에서 수리과학연구소에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다”며 “의료산업에서도 수학을 이용해 다양한 판독의 정확도를 높이고, 오진을 줄이는데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수학이 쓰이지만, 한국에선 산업수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 수학자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긴다는 게 김 소장의 생각이다.
김 소장은 “수학을 어디에 활용할 수 있는지, 수학을 왜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수학자가 되지 않더라도 수학을 공부하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글로벌한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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