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녹음까지'…돈 앞에 무너진 LG의 인화
[편집자주] 재계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누군가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세상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자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의 녹취록이 있다. 이 내용이 가족들간의 대화라서 전체 녹취록을 제출하기 어렵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 서부지방법원 410호 법정. 고 구본무 LG 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가 두딸과 함께 아들인 구광모 LG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상속회복청구 소송에서 나온 원고 측 변호인의 말이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LG 가족들끼리 집안에서 한 대화가 몰래 녹음됐다는 것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1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원고 변호인 측이 그 분량이 많아서 전체를 제공하는 게 어렵다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사건과 관련 없는 사적 대화도 다수 녹음돼 있다고 한다. 가족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간에선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도 나온다.
기자는 생전에 구본무 LG 회장을 여러번 만났고, 그가 가족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도 잘 안다. 그가 지금 하늘나라에서 이를 본다면 뭐라고 할지 뻔하다. "고마 됐다. 고마해라(그만 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듯하다.
이날 녹취록 발언은 그나마 양측의 화해에 한가닥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가족의 붕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LG 그룹은 창업 이래 지난 75년간 국내 그 어느 그룹보다도 잡음 없이 성장해왔다. 창업 회장 때부터 가지 많은 나무의 바람을 '장자승계'라는 기업문화로 잘 다스려왔던 곳이다.
불행하게도 고 구본무 회장의 장남인 구원모씨가 1994년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후 2004년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이 구광모 회장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사촌형의 짐을 대신한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큰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도록 운명지워졌다. 약 20년전부터 LG라는 기업 가문의 선한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원고 측은 고 구본무 회장의 경영권 지분((주)LG 지분)의 처분에 대한 유언장이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며 구광모 회장이 자신들을 '기망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소송으로 그에게 '주홍' 낙인을 찍었다.
하지만 경영권 지분은 애초부터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굳이 멀쩡한 조카를 양자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대 회장 생전에 매달 한남동 집에 불러 식구(食口)로서 가족 식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의 문제다.
그는 구자경 명예회장이나 구본무 회장의 뜻으로 양자로 입적된 후 LG 그룹을 이끌 승계자로 지명됐다. 단순히 구씨 가문의 제주(祭主)로서 역할이 아니라 그룹을 이끌라고 했다는 것은 LG 식구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몰래한 녹음이 '정당한 내몫'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라는 것은 변명일 수밖에 없다. 원고 측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몫은 사실 4대(구인회, 구자경, 구본무, 구광모)를 걸쳐 다른 가족들이 LG라는 공동체를 위해 위탁해 놓은 공동재산인 '문중 선산'과 같다. 구 회장은 그 선관(善管)이다.
장자승계 없이 형제간 균등분할식의 상속이 이어졌다면 창업 회장을 포함한 '인철정태평두(구인회, 철회, 정회, 태회,평회, 두회)' 6형제간에 이미 고루 나눠 가졌을 재산이다. 또 그 아래 '경승학두일극'(구자경, 자승, 자학, 자두, 자일, 자극) 형제와, '무능준식'(구본무, 본능, 본준, 본식) 외에 수많은 가족들이 장자에게 맡겨놓은 것들이다.
그나마 김 여사를 비롯한 딸들에게 주어진 5000억원 상당의 상속재산을 지켜준 것도 다투지 않고 이어온 이 가풍 덕분이다. 50년 동안 분란없이 지냈던 GS와의 분가도, LIG, LF, 아워홈, LS, LX와의 조용한 분리도 인화가 바탕이 됐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구본무 회장의 호인 화담(和談)이 부끄럽지 않게 소송을 접고 화해의 대화로서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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