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연꽃의 순정에 보는 이가 조신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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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뙤약볕 아래 핀 하얀 연꽃은 눈이 시리도록 맑다.
심산유곡의 난초와 달리 연꽃은 발길이 쉬이 닿는 곳에 핀다.
연꽃은 일상에서 익은말이 된 꽃이다.
'진흙에서 나와도 하얗구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아 혼탁한 세상에서 초연하여라.' 송나라 학자 주돈이가 이른 말을 되새긴 이인상은 멀리 갈수록 맑아지는 향기와 함부로 꺾을 수 없는 연꽃의 자부심도 그림에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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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부분 핑크로 수줍게 물들어
보일락 말락 색조 ‘담의 본색’
깨끗하고 은근한 절제에 솔깃
여름 뙤약볕 아래 핀 하얀 연꽃은 눈이 시리도록 맑다. 백련은 고상한 기품을 떨치지만 우쭐대는 티를 내지 않는다. 홍련은 어떤가. 눈이 금세 뜨거워진다. 붉은색이 찌를 듯이 다가와도 교태와 거리가 멀다. 야하기는커녕 혼자 애타는 심정을 머금는다. 심산유곡의 난초와 달리 연꽃은 발길이 쉬이 닿는 곳에 핀다. 연꽃이 피어야 ‘연(蓮)못’인데, 연이 없어도 노상 연못이라 부르니 그만하면 알조다. 연꽃은 일상에서 익은말이 된 꽃이다.
조선시대인들 서울에 연못이 적을까 보냐. 지금의 ‘농민신문’ 사옥 곁에 있던 ‘서지(西池)’는 여름날 으뜸가는 놀이터로 소문났다. 못 주변에 가지 휘늘어진 수양버들이 키를 재듯이 도열했고, 복숭아와 살구나무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압권은 서지의 못물에 빼곡히 들어찬 꽃들이었다. 죄다 뭐였는지 알겠는가. 바로 연꽃! 손에 꼽기도 힘든, 무려 1만그루가 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문인과 선비들이 풍류를 마다할까. 한철이면 서지에 뻔질나게 드나들곤 했다. 그들 노는 가락이 농염했다. 크고 동그란 연잎에 물을 채우고, 물에 띄운 연꽃 속에 유리잔을 넣고, 그 잔에 촛불을 켜놓는다. 이러구러 눈 호강을 누리다 연잎에 술을 부어 줄기에 입 대고 마시고는 밤 이슥도록 시 지으며 화창(話唱)한다. 서른다섯살의 문인화가 이인상도 동참했다. 서지에서 친구와 붓질, 잔(盞)질하다 그린 그림이 지금 보는 ‘서지 백련’이다.
해맑은 백련인데 끄트머리에 핑크빛이 수줍게 물들었다. 저 순정한 여성성이 기어코 보는 이를 조신하게 만든다. 하나는 위로 솟고, 하나는 아래로 떨군 두송이 꽃이 화면 왼쪽을 비운 듯 채운 듯하다. 잎은 꽃을 가리지 않는다. 살며시 물러서면서 보듬는다. 두 잎이 위아래에서 어긋나는 구성이 하물며 공교롭다. 잎들은 희디흰 색을 향해 스며드는 청록빛이다. 탈색의 속마음을 수굿이 드러낸다고 할까.
보일락 말락 하거나 싱겁기 그지없는 저 색조를 일컬어 ‘담(淡)의 본색’이라 부르고 싶다. ‘담’은 꾸밈이 없고 거짓되지 않은 물성이다. 이인상의 내심이 그러했다. 동료 화가 이윤영이 초를 잡은 백련이 하도 담담하여 물과 꽃이 분간이 안되자 자기가 거들었단다. 나머지를 완성해놓고 정작 하고픈 말은 귀퉁이에 썼다. ‘진흙에서 나와도 하얗구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아 혼탁한 세상에서 초연하여라.’ 송나라 학자 주돈이가 이른 말을 되새긴 이인상은 멀리 갈수록 맑아지는 향기와 함부로 꺾을 수 없는 연꽃의 자부심도 그림에 심었다.
연꽃은 군자의 덕성이 서린 꽃이되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어떤 이는 멀어지는 연향(蓮香)을 끌어와 차를 만들었다. 청나라 심복이 쓴 수필 ‘부생육기(浮生六記)’에 나오는 운(芸)이란 여인이 그랬다. 그녀는 연꽃봉오리가 입 다물 무렵 얇은 천에 찻잎을 싸서 넣었다가 다음날 입을 벌릴 때 끄집어내어 차를 끓였다. 차에 스민 향내가 오죽 달았을까.
부려(富麗)한 연꽃 자태를 아끼는 사람도 있다. 곱다랗게 피어난 꽃은 아닌 게 아니라 부럽다. 이 화가는 결이 다르다. 깨끗하고, 단출하고, 예스러운 느낌이 화폭을 감싸 은근한 절제가 풍긴다. ‘숨은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는 이인상의 미학에 솔깃해진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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