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천의 21세기 진보] ‘한국의 경제기적’과 농지개혁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0년 7월 한국을 선진국으로 지정했다. 회원국의 만장일치였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국가 중 최초이고, 유일한 사례다. 우리는 한국에 대해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을 K팝, K콘텐츠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 입장에서, 특히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한국에 대해 가장 부러운 것은 ‘경제 기적’이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3만5000달러에 근접했다. 배율로 치면 무려 350배가 증가했다.
경제학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경제성장이다. 경제성장은 빈곤을 타파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경제학 교과서들은 경제성장 과정을 자본투입(K) 증가량, 노동투입(L) 증가량, 총요소생산성(TFP) 증가량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 방식은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다분히 결과론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한국은 어떻게 경이적인 수준의 경제성장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 이상의 고성장을 30년 이상 달성한 나라는 매우 예외적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에 따르면 딱 11개 국가다. 1인당 GDP 증가율을 순위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적도기니(8.9%) ②오만(7.1%) ③리비아(7.1%) ④한국(7.0%) ⑤보츠와나(7.0%) ⑥타이완(6.8%) ⑦중국(6.5%) ⑧싱가포르(6.5%) ⑨일본(6.5%) ⑩사우디아라비아(5.9%) ⑪홍콩(5.8%)이다.
재밌는 것은 11개 국가는 다시 두 덩어리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자원 부국이다. 적도기니, 오만, 리비아, 보츠와나, 사우디아라비아가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이다. 한국, 타이완, 중국, 싱가포르, 일본, 홍콩이 해당한다.도시국가인 싱가포르와 홍콩을 논외로 하면, 한국, 타이완, 중국, 일본은 4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농지개혁을 했다. 둘째, 친미국가였다. 셋째, 제조업을 중시했다. 넷째, 지정학적으로 소련 혹은 공산주의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는 최전선에 위치했다. ①농지개혁 ②친미국가 ③제조업 중시 ④지정학적 위치는 서로 연결되어 작동했다. 이 중에서 특히 ‘농지개혁’에 집중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농지개혁에서 관전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 실시 배경이다. 일본, 한국, 타이완에서 농지개혁을 했던 이유는 모두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들 나라들은 모두 소련, 중국, 북한과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있다. 일본은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한국의 경우 3자 합작품이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조봉암 등의 진보적 국회 소장파의 공동 산물이었다. 타이완의 경우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이후 장제스가 실시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전면에 내걸고 승리한다. ‘민주당 정책’을 가로채서, 민주당을 지지하던 중도표를 빼앗아, 민주당에 승리한 경우였다. 농지개혁의 원리도 이와 같았다. ‘공산주의 세력의 정책’(농지개혁)을 수용해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정치적 경쟁에서 승리한 경우였다. 일본, 한국, 타이완은 ‘절반쯤은’ 공산화된 상태에서 출발한 나라였다.
지리학·지정학·지경학의 중요성
둘째, 농지개혁이 경제성장으로 연결되는 메커니즘이다. 두 가지가 중요했다. 하나는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자기만의 땅이 생기자 농민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다. 건국 직후 미국이 그러했듯이 대한민국은 ‘소농(小農)의 나라’로 출발했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 역시 농지개혁과 관련된다. 이후 농가소득은 급상승했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 투자다. 농지개혁이 되지 않았다면, 지주 계급도, 농민들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경제성장과 상관관계가 가장 높은 것 중 하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취학률이다. 한국의 경우 비슷한 시기에 의무교육이 도입됐다. 초등학교 및 중학교 취학률이 90%를 돌파한다. 문맹률은 급격히 하락한다. 아이들에 대한 높은 교육투자는 남미, 동남아시아와 구분되는 동북아시아 발전국가들의 핵심 특징이다.
셋째, 북한 농지개혁과 남한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다. 1980~1990년대 운동권 세미나에서 공부했던 내용은 북한 농지개혁이 더 진보적이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했다. 남한은 ‘유상몰수-유상분배’를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남한 농지개혁이 ‘더 진보적’이었다.
토지 소유권은 처분권, 상속권, 경작권, 수확 배분권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농민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의 농지개혁은 김일성 가문에 귀속된 것에 불과하다. 농민에게는 처분권도 없고, 상속권도 없다. 경작권만 있고, 수확물의 일부를 배분받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지주계급이 나눠주던 수확 배분을 김일성 가문이 해주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남한 농지개혁, 북한보다 진보적
반면, 남한의 농지개혁은 농민에게 귀속됐다. 농민에게는 처분권도 있고, 상속권도 있다. 온전히 농민의 것이 됐다. 게다가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농민들이 값아야 할 유상분배 몫은 20분의 1 수준으로 낮아졌다.
한국에서 경제성장이 실제로 이뤄진 과정은 지리학·지정학(地政學)·지경학(地經學)이 연동돼 작동했다. 일본, 타이완,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은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 국제공급망(GVC)의 급진적 재편, 급진적인 에너지 전환, 인구 구조의 급진적 재편 등이다. 외교·경제·사회를 아우르는 복합위기다. 그러나 현재 정치는 누가 더 한가한지, 누가 더 자극적인지 경쟁에 팔려 있다. 지금 우리에겐 새로운 위기, 새로운 미션을 수행하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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