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수·수향·스텔라… 목숨 건 품종 개발, 한국 과일이 더 달아졌다
새벽 1시, 서울 가락시장 과일 경매장. 토마토와 수박, 참외, 망고 등 전국에서 올라온 과일이 박스째 열을 맞춰 진열돼있다. 경매사를 실은 이동식 경매대가 박스 사이를 돌아다니면 중도매인들도 함께 따라 가며 경매에 들어간다. 점찍은 물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싼 물건이 나오는지 눈치작전 하는 사람, 백여 명 중간상이 바쁘게 움직인다.
지난 5~6월 초 과일 최고가를 찍은 건 망고도, 블루베리도 아닌 복숭아였다. 조생종인 ‘대극천’은 5월 말에는 1.5kg이 5만5000원(kg당 3만6000원), 6월 초에는 2kg 한 박스에 16만원에 낙찰됐다. 소비자가로는 10만~20만원이 넘는 가격이다. 복숭아는 10~20년 전에는 5, 6월에 나오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런 가격은 상상도 못 했다. 요즘 성수기를 맞은 복숭아는 2kg 한 박스 경매가가 2만원 내외지만, 장마에도 높은 당도를 지키는 신품종은 5만~6만원이다.
시장 개방하면 ‘다 죽는다’ 했지만
2000년대 초 “과일 시장 개방되면 과일 농가 다 죽는다”던 걱정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외산 과일 수입이 늘어난 건 맞는다. 2000년 이후 연평균 5.4%, 수입액은 11.8% 증가 추세다(농촌경제연구원). 망하거나 과수 농사를 접은 농민도 적잖다. 주요 과일 재배 면적은 연평균 1.9%, 생산량은 1.3% 감소했다.
그러나 과수 산업 전체로 보면, 과일 농가의 소득은 2003년 이후 16년간 71% 증가했다. 코로나는 농촌 소득의 감소를 불러왔다. 농촌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2022년 쌀 농가 소득은 평균 3156만원으로 전년비 13.6% 감소, 축산 농가도 6303만원으로 31.2% 감소했지만 과수 농가는 3.9% 증가한 4567만원이었다.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로서는 득이 많다. 유통, 관리 혁신으로 과일 신선도가 더 높아졌고, 무엇보다 맛있어졌다. ‘맛있다’는 과일 평가를 좌우하는 요소는 단연 단맛, 당도다.
쥬스보다 더 단 과일
과거보다 달아진 이유는 1.품종 개량 2.재배법 개선 3.적절한 비료 조절 4. 동남아 여행 등으로 인한 소비자의 단맛 선호 등이 이유로 꼽힌다. 20, 30년 전 9, 10브릭스(당도 단위)였던 복숭아는 요즘에는 수확 전 약 2주간 일조량이 풍부할 경우, 약 12~14브릭스까지 나온다. 감귤도 10브릭스에서 11브릭스로 달아졌다. 캔커피가 8.8, 콜라가 10.6, 오렌지 쥬스가 12브릭스다.
나무에 달리는 과일의 품종 개량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복숭아 신품종을 개발해 농가에 소개하기까지 15년, 농가가 생산해 소비자가 사먹기까지 5~10년이 걸린다. 김성종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농업연구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2019년까지 250품종을 이용해 822개 조합의 복숭아 품종을 만들어냈다. ‘진미’ ‘장호원황도’ ‘천중도백도’ 등 당도가 높은 12개의 품종이 30회 이상 사용돼 당도 높은 신품종이 만들어졌다.” 과거에는 황도, 백도만 알았지만 신품종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1987년 월봉조생(복숭아) 당도는 9.5브릭스였지만, 이후 본격 출시된 장호원황도가 12~14, 영봉, 스위트광황, 황금도 모두 약 13브릭스다. 추석 무렵 나오는 품종도 14브릭스쯤 된다.
포도도 마찬가지다. 농진청이 육성해 2020년 시장에 나온 아그데 품종은 19.9브릭스, 껍질째 먹는 ‘슈팅스타’ 품종은 19.8이다. 과거 흔히 먹던 캠벨은 16 정도였다. 아리수(사과) 수향(복숭아) 스텔라(포도) 자고나면 새 품종이 쏟아진다.
‘종자’도, 재배법도 달라졌다
키우는 법도 달라졌다. 복숭아의 경우, 묘목 사이를 넓게 벌려 나무 전체에 햇볕이 잘 들게 하고, 바닥에는 반사 필름을 깔아 햇볕을 흠뻑 받게 한다. 농진청 중심으로 재배법 연구에 전문가들이 달려들었다. 더 결정적인 건 품종 변화다.
품종 개발은 전쟁이었다. 다국적 종자회사, 농촌진흥청 R&D를 통해 이름도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신품종이 쏟아진다. 외국 품종에는 로열티를 내고 사오는 게 원칙이지만, 개인이 몰래 들여와 ‘신품종’이라고 시장에 내놓기도 한다. 농진청의 노력에 더해 탈법을 불사한 개인의 노력, 심지어 ‘실수’가 더해져 단맛이 진화하고 있다. 일본에서 몰래 복숭아 가지를 꺾어와 이름을 바꾸어 시장에 내놓는 경우도 있다.
고가로 유명한 A 품종의 경우, 국립보호종자원에 품종 보호 출원을 신청해놨으나 7년째 심사 중이다. 종자원 측은 “특정 종목에 대한 지연 사유를 밝힐 수는 없다”고 했다.
한 경매인은 이런 스토리를 전한다. “옛날에 충북 음성의 복숭아 농부가 사과 밭에다가 복숭아를 심었는데 이게 8월 말까지도 익지 않았어요. 복숭아 철이 끝나고 익었는데 너무 맛이 있는 거라. 이게 앨버트(엘바트)라는 품종이라. 다른 복숭아가 2만원일 때 그건 7만~8만원을 받아버렸어요.”
합리적 비료 사용으로 더 맛있어졌다
10여 년 전 농진청이 시험 재배한 여러 쌀 품종을 일본 쌀과 비교한 적이 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더니, 한국 쌀이 일본 쌀보다 월등히 점수가 높았다. 많은 이들이 믿지 못했다. 당시 전문가들이 쉬쉬했던 비밀이 있었다. “시험재배에서는 무기질 비료를 딱 권장량만큼 썼기에 밥맛이 싱겁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료 문제는 조선시대 당파싸움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이슈다. 비료를 옹호하는 측과 비난하는 측의 공방이 치열하다. 그래도 합리적 전문가들 의견은 이렇게 모아진다. “권장량만 쓰면 효율적이다. 죄악시할 필요도, 과신할 필요도 없다.”
한국 농가의 무기질 비료 남용을 바로잡은 건 ‘보조금 폐지’였다. 2000년 이후 비료 원재료 가격은 크게 올랐고, 정부는 지속적으로 무기질 비료 보조금을 삭감해왔다. 무기질 비료 성분 중 하나인 질소의 경우, 농협의 공급 추이에 따르면 1980년 45만톤에서 2010년 23.5만톤, 2021년 26만톤 정도로 80년대 이후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
농진청 계도에도 불구, 아직도 ‘권장량’을 초과하는 건 사실. 2017~2020 농진청이 대대적으로 조사한 결과, 벼, 노지채소, 시설재배(비닐하우스) 농가는 여전히 질소비료를 30% 초과해 쓰고 있었다. 과수 농가만 초과 사용량이 10%대 초반. 요즘은 보조금이 나오는 유기질 비료를 남용한다는 반론도 나온다. “친환경을 내세운 유기질 비료 역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잖다”는 주장이다.
과일계의 ‘황소개구리’ 스테비아 토마토, 스테비아 감자
단맛은 더 센 단맛을 부른다. 그 예가 ‘스테비아 토마토’다. ‘스테비아 토마토’는 일반 토마토를 스테비아 용액에 담그거나 압력을 가해 뿌리는 방식으로 만든다. 그래서 ‘과일’이 아니라 ‘과채 가공품’으로 분류되고, 농산물 경매시장에서도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형 마트, 유통 플랫폼에서는 스테비아 토마토뿐 아니라 스테비아 사과, 옥수수, 감자, 고구마까지 점점 품목이 늘어나고 있다. 가격도 30%이상 비싸다. ‘설탕풀’로도 불리는 ‘스테비아’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도 안전한 식품첨가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계는 ‘단맛 의존도’를 높인다고 보고 있다.
이재경 중앙청과 이사는 “한국 소비자들이 건강 이슈에 특히 민감하다. 초기에는 반짝 인기였지만 요즘은 공급 초과라 가격이 하락세에 들어섰다”고 했다. 대신 ‘단맛’은 거스르기 힘든 대세라고 본다. “동남아 여행 등을 통해 다양한 단맛을 경험한 소비자가 늘고, 고령층은 신맛보다 단맛을 좋아한다.”
‘특’이라서 샀는데 왜 맛이 없지
과일 박스를 보면 등급을 표시하는 칸이 있다. 대개 ‘특’이나 ‘상’이다. 이걸 믿고 샀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적잖다. 이재경 이사는 “토마토의 경우 80~90%가 ‘특’이라고 표시되어 온다. 자기 자식처럼 자기 과일은 다 ‘특’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경매사들은 생산자가 붙인 등급 표시 대신 직접 과일을 검수한 후 호가를 결정하고 있다. 이 역시 경매인마다 달라 “왜 내 과일 값을 적게 받아주느냐”고 분쟁이 생기기도 한다. 생산자-유통 전문가가 합의할 수 있는 ‘등급제’ 도입은 과일 유통의 중요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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