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광화문 집회, 그리고 집으로의 긴 여로
도심 집회 허용할지만 따지지 말고 장거리 통근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도시 상상할 수는 없을까
광화문 일대에서 빗속에 집회가 열렸던 지난 금요일 퇴근길. 버스 정보 앱을 켜니 평소 한 번에 두 대도 오던 버스가 도심 예닐곱 정류장 사이에 한 대도 없었다. 버스를 나타내는 아이콘은 그 구간 앞뒤로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분당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온 광역버스가 남산 1호터널을 지난 뒤 시내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원래는 거기부터 광화문~서울역~명동으로 이어지는 도심을 경유해 다시 1호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 집회는 끝났는지 세종대로에선 무대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그 여파에 비까지 내려 체증이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집회 때마다 있는 일이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상경(上京) 통근 8년 차에 접어든 분당인(人)으로서 나는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광화문에서 남산 터널 길목의 서울백병원 정류장까지 걷기로 했다. 조금 멀어도 그곳까지만 가면 1호터널을 막 지나와 방향을 돌리는 버스를 타고 바로 분당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나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집회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던 언젠가처럼 차라리 지하철 3개 노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게 나을 뻔했다. 정류장에 도착할 때쯤 버스는 정상 운행을 재개했다. 거기서 한참을 기다려 본들 꽉 막힌 도심을 뚫고 온 버스에 빈자리는 없을 것이고, 나는 이태원 참사 이후 입석이 엄격하게 금지된 버스를 몇 대씩 하릴없이 보내야 할 터였다.
버스 노선을 거슬러 빈자리가 남아있을 법한 정류장까지 다시 걸었다. 숭례문 앞에서 겨우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회사를 떠난 지 두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화가 나고 짜증스럽기보다는 허탈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월급쟁이로서 나의 가장 큰 성취는 다름 아닌 출근과 퇴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집회의 자유는 소중하다. 이동할 권리도 소중하다. 그사이에서 퇴근길 도심 집회를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도심 집회의 영향이 생각보다 멀리까지 미친다는 사실이다.
집회가 자주 열리는 세종대로 사거리~서울광장 사이는 500m 남짓이지만 이곳이 마비되면 30㎞ 가까이 떨어진 분당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도시 구조가 중심지와 주변 지역 사이의 장거리 통근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집회가 아니라 도시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밤 건축가 황두진의 책을 오랜만에 펼쳤다. 지금 한국의 도시를 점령한 건물 유형을 ‘시루떡 건축’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켜켜이 똑같은 색의 시루떡처럼 한 가지 용도로만 쓰이는 건물이다. 도심에는 사무실만 있고 외곽에는 아파트만 있는 도시에선 많은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양쪽을 오가야 한다. 도시 차원에서도 개인의 차원에서도 소모적이다. 나만 해도 출퇴근 시간을 알차게 보내겠다고 매번 다짐하지만 실제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기 일쑤다.
건축가의 제안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지개떡 건축’. 층층이 색이 다른 무지개떡처럼 주거와 상업·공공시설 등 여러 용도가 수직으로 복합된 건물이다. 도시에 이런 건물이 많아지면 상주 인구와 유동 인구가 적절히 어우러지고 직장과 주거의 거리가 줄어든다. 그곳에서 직주근접(職住近接)은 아파트 광고의 카피 문구가 아니다.
매일 최소 두 시간을 출퇴근에 바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제시간에 마중 나가지 못할까 봐 퇴근길에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보다 운동을 많이 하고 가끔 가족을 위해 저녁밥을 지을 여유도 생길 것이다.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고? 미리 단념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데서 변화가 시작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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