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초등교사의 죽음... 그 비극까지 파고든 가짜 뉴스
20일 아침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정문에는 조화 200여 개가 놓여 있었다. 학교 담벼락을 둘러쌀 정도로 조화가 전국에서 밀려왔다. 정문에 나붙은 200여 개의 쪽지에는 “그냥 눈물만 납니다” “원인 규명이 필요합니다” 등이 적혀 있었다. “힘든데 왜 혼자 꾹꾹 참고 있었어”라고 적고 눈물을 훔치거나 오열하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오후엔 1000여 명의 교사와 시민이 검은 마스크를 쓰고 학교 앞에 모였다.
지난 18일 이 학교 내에서 극단 선택을 한 교사 A씨를 추모하는 물결이었다. 교대를 갓 졸업한 교사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스러진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극단 선택의 원인 등은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 그런데 18일 오후부터 온라인 공간에선 교사의 죽음을 둘러싼 온갖 소문과 억측이 돌기 시작했다. “신규 교사가 학부모의 악질적 괴롭힘으로 자살했다”는 글부터 올라왔다. 19일엔 “교육청에 불려간 다음 날 자살” “학부모 가족이 3선 국회의원” “증거 인멸” 등이 돌았다. 모두 확인되지 않거나 사실이 아닌 내용이었다. 대다수 언론들은 ‘극단 선택을 했다’는 팩트 외에 미확인 내용은 전달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학부모가 대단한 집안이라 기사를 막았다” “교육청이 엠바고(보도 유예)를 걸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이 이런 글을 번개 속도로 퍼날랐다. 19일 저녁이 되자 온라인 공간은 추모와 분노로 끓어올랐다. 특정 정치인의 실명과 거주지가 거론되고 ‘진상 학부모 찾기’도 벌어졌다.
이날 아침 방송인 김어준씨가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국민의힘 소속 3선 의원으로 알고 있다” “대단한 파장이 있을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확인되지 않은 온라인 소문을 ‘국민의힘 3선 의원’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한 시간 반쯤 뒤 국민의힘 한기호(3선) 의원은 성명을 내고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이 무분별하게 유포되고 있는 것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허위 사실 유포 등 혐의로 김씨를 고발하기로 했다. 한 의원처럼 이름이 거론된 정치인들은 밤새 소문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날 오전 서이초등학교도 입장문을 내고 온라인 소문에 대한 사실관계를 밝히며 “부정확한 내용들이 고인의 죽음을 명예롭지 못하게 하며 많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교사의 죽음도 온라인 루머 -> 커뮤니티 등에서 급속 확산 -> 음모론자의 편승 과정을 거치며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대중을 흥분하게 만든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사건은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 어린 교사의 극단 선택, 강남의 극성 학부모, 3선 국회의원, 언론 은폐 같은 단어와 관련 소문이 말초신경을 건드렸다. 음모론자들이 선동으로 불씨를 키웠다. 여기에 일선 교사들이 학교에서 겪은 폭력과 폭언, 불공정이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다. 최근 초등학교 교사가 학생에게 무차별 폭행당한 사건도 벌어졌다. 강남 학부모가 자식을 떠받들며 교사를 시종처럼 부린다는 얘기도 자주 들린다. 학생과 학부모는 걸핏하면 교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전직 고교 교사는 “학생 인권만 있고 교사 인권은 없느냐”고 했다. 사회 초년병·강남·국회의원·은폐 소문에 일선 교사의 쌓인 불만이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하는 양상이다.
교사 유족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온라인상에 확인되지 않은 글들이 올라와 매우 힘들어한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부모의 갑질이 됐든, 악성 민원이 됐든,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가 됐든 그것이 이번 죽음과 관련 있는지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교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교육 환경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이번에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교사 죽음에 대한 진상은 밝혀져야 하고, 교육 현장의 병폐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온라인 소문과 억측에 휘둘리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경찰은 유족이 ‘학부모 갑질’ 등에 대한 사실 규명을 요청한 만큼 이를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교사가 평소 자신의 심경을 기록한 일기장을 분석 중이다. 이 일기장엔 특정인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학교 생활의 고충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일기장 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교사가 사망 일주일 전 학폭 가해 부모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는 주장도 파악 중이다. 교사가 개인적 사정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수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윤상진·고유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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