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각자도생 시대에 ‘백제’를 생각한다
처음 간 건 아니었지만 나이가 알려주는 게 있었다. 도심 한복판의 폐사지인 정림사지 오층 석탑. 때를 잘 맞추어 마침 하루가 저무는 무렵이었다. 바람도 어디로 자러 가겠다는 듯 한결 순해지고 석양의 탑 그림자가 길게 내 발등을 눌렀다.
문득 부여의 지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도울 扶, 남을 餘. 이런 넉넉한 뜻으로 이름을 삼은 이들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시간을 살아낸 분들이었을까.
내처 들른 박물관에서 만난 뜻밖의 문장에 넋을 온전히 빼앗겼다. 왕흥사지 청동제사리합에 새긴 6행 29자의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붓글씨와는 또 다른 맛의 그 고졸함과 그 검박함! 앞에서 백제를 안 좋아할 도리가 없었다. 충청 땅을 무작정 밟으며 그렇게 백제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그 이후 백제는 늘그막의 새로운 공부 주제로 추가되었다. 낯선 곳에서 기이한 풍경에 몸 섞으며 어리둥절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 세모의 하루 저녁에는 정림사지의 닫힌 문 앞에서 꼭 서성거렸다. 돌무덤 하나라도 기대하면서 넉넉한 논밭 사잇길을 무작정 돌아다니면 옛 백제는 어김없이 눈앞에 턱, 돌탑 하나를 세워주셨다.
지금 사는 세상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질 때 내 마음속 새롭게 개척한 영토로 망명하듯 고대로 들어가면 그대로 피난처가 된다. 관찰하면 하늘과 돌에는 따로 구분되는 시간이란 없다.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장소 아닌가. 우리 시대도 언젠가 그 누군가에게 고대처럼 여겨지는 날이 있다. 그때 그들은 우리한테 무엇을 읽고 갈까.
난데없는 극한폭우에 백제가 크게 비의 화를 입었다.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왕릉원의 토사도 유실되었다. “재난 때마다 변명 늘어놓는 정부, 그럼 국가는 왜 존재하나” “오송 지하차도 수몰참사, 재해 때마다 겪는 ‘무정부 상태’” “2년째 물난리, 국가는 또 없었다” 지붕만 겨우 남긴 공산성 만하루의 사진 옆으로 송곳 같은 기사들이 떠다닌다. 백제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그게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누구나 다 안다. 갈수록 각자도생의 처지로 내몰리고 있는 우리 시대는 언제 저 주어를 되찾을 것인가.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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