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4 . 가리왕산: 이끼의 시간
산이 품은 시원함 만끽 장전계곡 산행
장구목이골 입구서 정상까지 4.1㎞
이끼계곡 여름 산행지로 등산객에 인기
발걸음 붙잡는 다양한 종류 이끼 눈길
물줄기 옆·땅·바위 모두 초록 융단
고요함을 풍요로 채우는 생명 원형
아무래도 하늘이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일기 예보만 믿다가 하루를 통째로 날려버렸습니다. 산에 가기 좋은 날만 내내 지켜보던 중이었거든요. 온종일 비로 잡혀 있어서 아침부터 마음을 다른 일로 돌려두고 있었는데 정오쯤 되자 거짓말처럼 구름이 싹 걷히면서 쨍하고 해가 뜨더니 기다렸다는 듯 매미가 신나게 울어댑니다. 세기말 같았던 조금 전의 상황과 같은 세계의 일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한 날씨입니다.
그러다 또 어떤 날은 오후에 비가 그치고 날이 갠다고 해서 아침부터 부지런히 산에 갈 준비를 하던 차였는데 어쩐지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는 것 같아 다시 일기 예보를 확인하니 도대체 언제 바뀐 건지 온종일 비로 잡혀 있습니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런 일이 허다하게 반복된 요즘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름을 빗속에 갇혀 농락만 당하고 어디도 가지 못했습니다. 바야흐로 장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도 사계절이 아닌 우기와 건기로 나뉠 날이 머지않은 듯합니다.
언제 끝을 볼지 기약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그 시간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묵묵히 하는 것. 마치 비가 비의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처럼요. 더는 물러설 곳도 없고 그럴 이유와 여유도 없다고 생각하자 용기가 생겼습니다. 눈 뜬 새벽 정상으로 무조건 직행하기로 합니다. 거센 빗줄기 앞에서 혹여 다짐이 약해질까 자기 전 미리 배낭을 꾸려 현관 앞에 놓아두며 의지를 다집니다. 베개에 머리를 대는 그 순간까지도 창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립니다.
여름 등산으로는 계곡 산행만 한 것이 없습니다. 수해 전 양양 법수치 계곡을 거슬러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야말로 물 반 산 반이었는데 가장자리에 난 비좁은 산길을 애써 찾아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두 발을 계곡에 첨벙 담가 저벅저벅 물길을 걸었던 기억이요.
법수치 계곡이 연어가 거슬러 오르는 남대천의 상류였던 만큼 강산에의 노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을 흥얼거렸던 기억도 납니다. 여름의 산을 생각할 때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모처럼의 계곡 산행을 준비하며 오래된 산 하나가 유독 길게 제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눈이 좋은 고산이라 겨울에 가도 좋겠지만 그 산이 품은 시원한 계곡을 꼭 한 번 제대로 보고 싶어서요. 바로 이름도 찬란한 ‘가리왕산(加里王山)’입니다. 이 산에 이르기까지 사실 저에게는 용기가 조금 필요했습니다. 5년 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이 산의 500년 된 숲을 송두리째 밀어내고 3일간의 알파인 스키 경기를 위해 활강 스키장을 만드는 공사 현장을 목격하면서 인간으로서 참담함과 무력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리왕산 장전계곡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 장구목이골 등산로 입구로 향합니다. 장구목이골은 활강 스키장 건설 대상지였던 숙암골과 함께 가리왕산을 대표하는 원시림에 속합니다. 과거의 스키장은 이제 케이블카가 다니는 관광지로 변했습니다.
이를 두고 올림픽이 끝났으니 애초의 합의대로 가리왕산을 다시 본래의 숲으로 복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환경 단체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하지만 관광 시설을 통해 고립된 지역의 경제가 조금이나마 살아나기를 바라는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립니다. 그래도 폐허가 된 숲을 보는 것은 여전히 힘이 듭니다.
장구목이골 등산로 입구에서 가리왕산 정상까지는 4.1㎞입니다. 오전 8시, 가리왕산 정상을 향해 장전계곡을 천천히 거슬러 오릅니다. 가리왕산에는 깊은 골짜기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한 곳이 북쪽 기슭의 장전계곡입니다. 진부면 장전리에서 흘러 장전계곡이라 불리는 이곳은 등산객 사이에서 ‘이끼계곡’으로 통합니다. 가리왕산의 유래는 이 산이 옛날 맥국의 갈왕(葛王)이 피신한 산이라는 설에서 전해지며,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의 가리왕산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흐리던 날씨가 서서히 개고 있습니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오전은 조금 맑을 예정이고 비는 정오부터 내린다고 합니다. 아침을 잽싸게 가르며 정상을 노려볼 요량이지만 또 하늘이 무슨 변덕을 어떻게 부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빗줄기에 막무가내로 젖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대비를 하니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가리왕산은 해발 1561m의 고산 준봉입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니지요. 서두르지 않으면 정상에 이르기도 전에 빗속에서 조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계곡 산행 명소답게 등산로 초입부터 공기가 서늘합니다. 산에 들어선 지 100m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저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모골이 송연할 지경입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연의 한기가 반갑습니다. 지척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 한데 유감스럽게도 어쩌면 오늘은 단 한 발자국도 좀처럼 서두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추고 또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추다 결국에는 호되게 비를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눈앞의 이끼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끼를 본 적이 있나요? 스쳐 지나가듯 말고 한자리에서 아주 오래, 아주 자세히요. 저는 이끼가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이날 이 산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뭐랄까요,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생명의 어떤 원형 같았습니다. 살아 있는 생물이지만 잎도 꽃도 열매도 뿌리도 아닌, 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그 모든 것인 완전한 생물이요. 새하얀 물줄기가 실처럼 흐르는 은둔의 계곡 옆에서, 초록빛 이끼가 융단처럼 포근하게 깔린 땅과 바위와 나무줄기 위에서 저는 어깨에 멘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낮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그 숲은 마치 기억 너머에서 언제나 나를 부르는 엄마의 자궁처럼 다가왔습니다.
이끼는 물속에 살던 하등 식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진화 과정을 거쳐 육지로 올라와서는 지금의 육상 식물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장하는 데 반드시 물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그늘이 지고 습기가 있는 숲이나 계곡의 바위 등에서 살게 된 겁니다. 이끼가 자라는 데는 습도뿐만 아니라 빛의 양과 온도도 중요했습니다. 빛의 양이 많고 온도가 높으면 습도가 낮아지므로 이끼가 살기에는 좋은 환경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빛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니고 그늘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닌 겁니다. 어떤 생명은 소외된 그늘 속에서 비로소 숨 쉽니다.
출발한 지 2㎞쯤 지났을까요? 희미해지는 물줄기를 따라 물소리도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가늘게 쏟아지던 햇살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산세는 어느새 경사 거친 산등성이로 바뀌어 있습니다. 희뿌연 안개가 내린 산기슭마다 신령 같은 주목이 우뚝 서 있습니다. 거리상으로는 올라온 만큼만 가면 됩니다. 한데 어두워지는 하늘 때문인지 마음이 급해집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이 물소리를 듣고 이끼를 보는 풍요의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시간은 아마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상에 닿으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시간일 겁니다.
수백 년 된 고목 사이로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해발 1561m의 정상을 향해 온몸으로 고도를 올립니다. 더는 멈출 곳도,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는 산속에서 문득 조금 전 만난 이끼에 대해 생각합니다.
잎도 꽃도 열매도 뿌리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이미 그 모든 것인 어떤 생명에 대해. 만물이 찰나의 태양을 쫓으며 이리저리 흔들릴 때 넓고 깊은 그늘에서 낮은 자세로 숨 쉬며 최초의 대지가 되어주는 어떤 생명에 대해. 그 산에 흐른 억겁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어떤 생명에 대해. 그것은 내가 지나왔고 나를 키웠지만 끝내 내가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나의 기원일지도 모릅니다. 그사이 상봉과 중봉을 가르는 능선에 도착합니다. 정상까지는 이제 200m 남았습니다.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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