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 교집합, 신인류 사랑은 어떻게 변해갈까[전문가의 세계 - 박승일 영화X기술]

기자 2023. 7. 2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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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접속 : 새로운 매체적 감수성과 신인류 등장

아마도 궁금할 것이다. 왜 갑자기 영화 <접속>인지. 이 영화는 무려 26년 전의 영화이고, 그동안 이 칼럼에서 다루어 왔던 SF 영화도 아니며, 심지어 로맨스 영화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긴 그렇다. 분명 기술 영화는 아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막 시작된 어떤 기술적 변화를 일상의 풍경처럼 담아내는 한편, 그 변화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은연중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술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를 본 독자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일 텐데, 영화 <접속>에서의 사랑은 사실상 PC통신이라는 기술적 조건의 출현과 함께 비로소 그 구체적인 현실성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편지와 전화가 사랑의 매개적 조건인 때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사랑 또한 손글씨와 대화라는 자체의 특징에 맞게 달리 표현되었던 것처럼, 1997년의 우리는 돌연 다른 무엇이 아닌 컴퓨터로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바로 그것이 지금 시대의 희미한 원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접속>은 혹시 신인류의 ‘등장’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1997년, 인터넷과 함께 말이다.

동현과 수현을 이어준 PC통신…1997년 인터넷 등장은 감각·소통·관계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기술 발전은 우리와 세계를 계속 재구성한다
불가능한 회귀를 택하기보다 현재를 응시하자…‘접속’은 이미 희미한 과거가 되었으므로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제목 <접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PC통신이라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물론 변화는 단절적이지 않으며 여러모로 중첩되어 있다. 영화는 다양한 미디어 전경을 교차시키면서 그 각각이 어떻게 당대의 감수성을 복합적으로 구성하고 있는지를 영화적 서사 속에 찬찬히 녹여낸다. 그 한편에 라디오와 LP로 대표되는 올드미디어의 감수성이 있다면, 그래서 거기에 동반되는 아련한 사랑의 감정과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전화 홈쇼핑과 PC통신 등으로 상징되는 급속한 변화의 흐름이 있다. 후자는 새롭고 세련된 것으로 표상되는 뉴미디어의 감수성이며, 그렇기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해와 기억, 감각, 소통, 관계의 방식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익명성과 탈장소성이라는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 영화는 바로 이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무엇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의 우리는 이 변화를 어떻게 마주했던 것일까?

전자에서 후자로의 변화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미디어 전경의 중첩적인 변화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시대적 감수성의 변화이자 그 안에서 감각하고 소통하고 관계 맺는 우리네 삶의 변화이며, 영화적으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의 변화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세계 변화의 계기가 아닐까? 덧붙여서, 영화는 여기에 삐삐라는 과도기적 단계를 삽입한다. 다시 말하지만, 변화는 우리의 삶이 그렇듯 단절적이지 않다. 전화와 휴대폰 사이에 잠깐 존재했던 삐삐가 은유적으로 보여주듯이,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 (근)미래의 미디어가 어지러이 공존하는 당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바로 그 위에 그만큼이나 얽히고설켜 있는 로맨스의 서사를 그대로 포개어 낸다.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아날로그 감수성에서 디지털 감수성으로, 그리고 또 다른 사랑으로. 영화는 한 원과 다른 한 원이 겹쳐진 교집합의 영역이 당시의 세계임을, 또한 우리의 사랑은 오직 그 세계를 무대로 삼을 수밖에 없음을, 나지막하지만 정직하게 진술한다.

라디오와 삐삐, 과거와 현재, 미디어와 삶

장면 하나.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의 PD인 동현(한석규)은 자신을 떠난 옛 연인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그에게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LP판이 배달되고 그는 그것이 과거의 연인이 보낸 것임을 직감한다. 그의 삶은 다시 한번 흔들린다. 왜 그녀는 자신과의 추억이 담긴 LP판을 보냈을까? 다시 시작하자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잊으라는 것일까? 그는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 ‘페일 블루 아이즈(Pale Blue Eyes)’를 틀고, 우연찮게도 이 노래는 혼자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던 수현(전도연)에게 가닿는다. 사실 동현은 청취율에 영합해 최신곡을 틀기보다는 20분짜리 옛날 노래를 틀면서까지 자기 프로그램의 색깔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보다는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저 앨범과 노래는 연인과 함께 들었던 과거의 기억이기에 대체 불가능한 것이며,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기에 그만큼 간절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현재의 여인 은희(추상미)마저도 그는 거부하고 만다. 그러고 보면 라디오와 LP 그리고 동현, 이 모두는 묘하게 서로 닮아 있다. 라디오와 LP가 시간성의 매체인 것처럼, 그래서 재생되고 나면 이내 과거로 흩어지는 것처럼, 그 또한 현재를 살아가지만 그의 시선만큼은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있다. 이미 과거가 된 미디어, 과거로 흐르는 (과거의) 음악, 그리고 과거에 머문 그의 삶, 영화는 이 아날로지(유비)를 통해 미디어와 삶의 나란한 방향성을 암시한다.

장면 둘. 수현은 친구의 남자친구인 기철(김태우)을 사랑한다. 그녀의 직업은 홈쇼핑 텔레마케터, 1997년 당시에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직업군이다. 헤드셋을 끼고 개인용 컴퓨터 앞에 앉아 통신 케이블로 연결된 익명의 고객을 상대하는 게 그녀의 업무이다. 사람을 직접 만나 물건을 사고팔던 시대는 이제 거실에 앉아 전화와 컴퓨터로 편하게 주문하는 시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동현과 달리 수현은 눈앞의 변화를 기민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변화에 맞게 자신을 바꾸어 가는 현재적 인간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과거의 누군가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를 사랑한다. 하필 그가 친구의 남자친구이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지만, 그를 향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은 도무지 막을 수가 없다. 그런 그녀에게 동현은 쓸데없는 감정 때문에 진짜 사랑을 놓칠 수 있다고,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충고한다.

이 가운데 마치 맥거핀처럼 꽤나 자주 등장하는 무언가가 있으니, 당대에 한동안 많이 사용되었던 삐삐이다. 삐삐는 상대방을 호출할 수 있는 장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상대방의 응답을 자동으로 담보하지는 않는다. 나는 시간을 가로질러 너에게 갈 수 있지만 너는 공간을 가로질러 나에게 올 수는 없다. 삐삐란 시간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동현과 수현의 차이를 보여주지만, 그래서 수현이 과거가 아닌 현재 속에 사는 인물임을 부각시키지만, 동시에 공간을 극복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수현 또한 나와 너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그 거리에 여전히 속박되어 있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도 삐삐와 현재 그리고 수현은 아날로지를 이룬다.

익명성과 탈장소성이라는 새로운 감수성

장면 셋. 이런 동현과 수현은 PC통신을 통해 서로에게 접속한다. 발단은 이렇다. 동현이 선곡한 ‘페일 블루 아이즈’를 들은 수현은 유니텔을 이용해 다시 이 노래를 신청한다. 동현은 혹시 이 신청자가 자신의 옛 연인이 아닐까 생각해 메시지를 보내고, 수현은 PC통신의 익명성에 기대어 그가 원하는 답변을 내어준다. 이후 동현이 집요하게 캐묻자 수현은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손편지를 폴라로이드(이 또한 현재성의 매체이다) 사진기로 찍어 보내고, 그 뒤로 둘은 점차 이런저런 대화를 마음 편히 나눌 만큼 친한 친구가 되어간다. 동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은희를 거부할 만큼 과거에 매몰되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수현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 수현 또한 생면부지인 그에게 친구의 연인을 향한 복잡미묘한 마음을 다 토로할 만큼 그가 가깝게 느껴진다. 왜일까? 여기에는 단지 둘만의 인간적 친화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매체적 감수성이 놓여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할 수 있듯이, 동현과 수현의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은 PC통신이라는 당시의 매개적 조건을 바탕으로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감각, 이것이야말로 PC통신이 새롭게 열어젖힌 시대적 변화였다. 영화에서 동현과 수현은 비 오는 날의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LP 상점의 좁은 계단에서, 지하철의 건너편 객석에서 우연히 마주치지만, 오히려 이 실제적인 마주침은 아무런 사건이 되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파란색 모니터 화면에 명멸하는 닉네임 ‘해피엔드’와 ‘여자2’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의미인 것이다. 시공간 격차를 모두 극복하면서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세계, 실제의 나를 밝히지 않아도 되기에 더없이 편안하고 부담 없는 세계가 하나의 생활 감각으로 우리 눈앞에 당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과 소통과 관계의 양식을 새롭게 주조해 내고 있었다.

장면 넷. 수현은 호주로 이민을 떠나려는 동현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다. 그리고 전화 응답기에 이런 말을 남긴다. “당신을 본 적은 없지만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 것 같았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고 그냥 가는군요.” 그들은 지난 시대의 마지막 인간이기도 했기에, 디지털 세계에서의 추상적 접속을 아날로그 세계의 신체적 느낌으로 기어이 전환하기를 바란다. 디지털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 둘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만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처음 본 그(녀)의 얼굴, 침묵과 떨림, 어색한 웃음, 마주 선 두 사람. 영화는 디지털 감수성으로의 변화를 긍정하면서도 돌연 그 끝자락에서 아날로그 감수성으로의 회귀를 감행한다. 마치 ‘사랑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반문하듯 말이다. 그런데 잠깐만, 그때는 아직 과거로의 회귀가 가능했구나!

오직 이해만이 새 가능성을 불러올 수 있다

앞에서 나는 신인류의 ‘탄생’이 아니라 ‘등장’이라고 썼다. 의도적인 표현이다. 나는 새로운 세대가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태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텔레비전 시대와 인터넷 시대 그리고 스마트폰 시대의 인간은,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감각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1997년의 <접속>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인터넷으로의 매체적 이동이 시작되던 바로 그 순간을, 그러니까 인류가 새롭게 구성되어 가던 그 순간을 소통과 관계, 사랑이라는 생활 감각의 변화와 함께 담아냈기 때문이다. 1995년의 <공각기동대>와 1999년의 <매트릭스>가 미래에 대한 급진적인 상상에 집중한 나머지, 반대로 현재적 변화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침묵했다면, <접속>은 도리어 시선을 당대의 한가운데로 돌려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지를 특유의 감각적 시선으로 포착해 내었던 것이다.

이제는 동현과 수현도 이미 오래전 세대가 되어 버렸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는 또 다른 인간으로 (재)구성되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계, 시공간을 한껏 압축해 버린 스마트폰 문화, 리얼리티 세계를 마침내 대체해 버린 유튜브 공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드라마,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보는 세대, 줄임말과 이모티콘으로 가득한 대화창, 줄곧 제기되는 문해력 문제, 인간 대신 읽고 쓰고 말하는 인공지능 등, 1990년대에 시작된 변화는 더 이상 따라잡기가 힘들 만큼 빠르게 가속화되고 있고, 그 범위 또한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끝 간 데 없이 밀어붙여지고 있다. <접속>은 아날로그 감수성으로의 회귀를 선택할 여지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낭만적인 옛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한석규는 그 유명한 휴대폰 광고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이제 그런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린 1997년보다 한참을 멀리 나와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인터넷 접속을 끊고 아날로그 세계로 돌아가라는 식의 불가능한 답변을 내놓기보다는, 영화 <접속>이 변화의 한복판에서 그 변화를 응시하면서 시대적인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오히려 그 문제의식을 지금-여기 우리의 사유로 충실히 재번역해야 하는 게 아닐까? 즉 무엇보다 이 시대의 새로운 매체적 감수성을, 그 생활 감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이 변화가 과연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로 새롭게 구성되어 가고 있는지,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서로 소통하고 감각하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럴 때에야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지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오직 이해만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불러올 수 있다.

박승일



캣츠랩(CATS Lab) 소장이자 기술문화연구자. 공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아울러 인문학도 공부하고 있다.

정직한 공부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기계, 권력,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박승일 캣츠랩 소장·기술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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