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파파’의 빨간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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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李光耀·1923~2015) 초대 싱가포르 총리는 생전에 빨간색 서류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두께가 14cm나 되는 이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질문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말썽 부리는 사람들을 혼내줄 수 있는 날카로운 도끼가 있다”고 했습니다. 농담으로 즉답을 피한 겁니다.
리 전 총리가 별세하고 난 이후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헹 스위킷 현 부총리는 슬쩍 빨간 가방을 열어본 적 있다고 했습니다. 정책 구상을 담은 메모, 외국 정상들과의 대화록, 회의를 녹음한 테이프 등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가방이 국정을 위한 ‘아이디어 뱅크’였던 셈이죠.
리 전 총리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라. 표현의 자유? 아니다. 집, 의료품, 직업, 학교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등으로 엉킨 민족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시대 영국에서 들어온 영어를 제1 공용어로 삼았습니다.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중국계가 반발하자 그는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과거의 어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설득했습니다.
리 전 총리는 80대 후반이 되자 “내가 죽으면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지 말고 헐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낡은 집을 그대로 두지 말고 재개발해서 높은 건물을 올리라는 겁니다. 그러고서 화장(火葬)을 선택해 마지막까지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인들은 리 전 총리를 ‘파파(papa)’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아버지처럼 여겼죠. 그가 총리로 재임하는 31년 사이 1인당 GDP는 400달러에서 1만2750달러로 30배 넘게 늘었습니다. 리 전 총리가 별세하자 아들 리셴룽 총리는 추모사를 낭독하며 아버지가 생전에 했던 말을 소개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나는 무엇을 가지게 될까? 싱가포르의 성공이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가? 바로 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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