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서러움이 되기 전에

한겨레 2023. 7. 2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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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

1 _누구나 낯선 곳에 선다

그럼에도 은혜씨와 나는 아직 살고 있다. 은혜씨는 학교 일을 시작하고, 가치 있다고 여겼던 일을 동료들과 도모했고, 나는 밥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는 동네 친구들이 늘어가며 남의 땅이 아닌 ‘우리 동네’에서 살게 됐다. 인종 너머 서로에게 감탄하는 친구가 늘어갔다. 사는 곳의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게 됐다. 그리움이 서러움을 부르지는 않는다.

자의건 타의건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곳에서 터 잡아 삶의 뿌리를 내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차별이나 멸시를 일삼는 이들도 있고, 당사자들은 그리움이나 외로움에 힘겨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 아닌가. 누구든 어디서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오롯이 인간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게티이미지뱅크

“맙소사! 2700년이나 된 거였어.”

올봄 우리 동네 멘자니타 거리를 운전해 가는 길에 터져 나온 각성이었다. 그즈음 <그리스 비극>을 읽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 관한 책으로, 반 넘게 읽으면서도 한 분석 대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난 자와 고향에서 끌려 나온 자 그리고 검은 피부’라는 비루함의 조건. 2700년이나 묵은 2등 시민의 표식 아닌가! 이민자로 21년을 살아온 나는 그 표식을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차고 있는 청승주머니라고만 여겼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2002년, 피앙세 비자(결혼이민 비자)를 받아든 내게 어머니는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나와 네 아빠가 실향민 1세대로 너희를 키웠듯이 미국에서 네가 1세대가 되어 시조를 이루는 거야.”

너무 거창한 서사라고 생각했다. 실향민 2세라고 여겨본 적도 없을뿐더러,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만이 앞섰다. 독립한다는 벅차오름도 있었다. 그때는 미국 이민이 서른한살에 하는 유치원 입학인 줄 몰랐다.

먼저 온 이민자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우길 조언했다. 성취했던 것을 잊어야 빨리 중학생이 되고 어른이 된다는 엄포였다. 성인을 위한 학교에서 공짜로 영어를 배울 때, 내 옆에 앉은 빅토리아는 모스크바대학교 졸업장은 북극해 저편에 두고 왔다며 이민 전 삶을 ‘전생’이라고 불렀다. 몰도바에서 온 중년의 소아과 의사 로아나는 간호조무사 수업을 듣겠다고 했다. 그녀의 영어 발음이 좀체 알아듣기 힘들어서 수술복 같은 진녹색 옷을 입고 나타나서야 이해했다.

2014년, 세계 석학들과 문명을 진단하는 인터뷰를 이어갈 때였다. ‘스리랑카의 간디’로 불리는 공동체운동가 아리야라트네를 만나러 인천에서 스리랑카로 떠났다. 도쿄에서 갈아타는 여정이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할 기미를 안 보였다. 뒤늦게 기체 결함으로 점검 중이라는 방송이 나오길래 연결 비행기를 놓칠 것 같아 승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승무원은 일단 내리자고 했다. 탑승할 때 인사 나눴던 스리랑카 청년 여덟명이 생각났다. 경기도와 전라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휴가 가는 이도 귀국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내렸다. 항공사 직원이 밤 10시40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직행 항공편을 제안했다. 12시간 뒤 출발하니 공항호텔 숙박권도 주겠다고 했다. 일정보다 반나절 늦어지지만 가장 빠른 대안이었다.

청년들은 한국 국적인 나와 달리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다시 입국신고를 해야 했다. 나도 따라갔다. 출국장 근처였고, 정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문틀에 기대어 서있었다. 옷맵시가 빼어났다. 그녀의 청년들을 보는 눈빛은 싸늘했다.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돌렸다. 외치고 싶었다. “당신의 눈빛이 차별이야!”

항공사 데스크로 옮겨 숙박권과 식권을 받고, 나는 한가지를 요청했다. ‘다들 지방에 살기에 열차를 타러 콜롬보 시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새벽이라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외국 항공사는 숙소를 제공하거나 표 살 때 쓸 수 있는 바우처로 변상하니 택시비를 지급하면 좋겠다.’ 옆에 있던 직원이 책임자에게 속삭였다. “얘네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럼, 누구에게는 할 필요가 있을까? 책임자는 택시비 영수증을 가지고 오면 지불하겠다고 했다. 귀국하는 이들은 어떡하냐고 묻는데, 디네쉬가 나를 말렸다. 한국어를 제일 잘하는 친구다.

이튿날 새벽 4시, 콜롬보 국제공항. 대합실은 환영객으로 북적거렸다. 아이부터 지팡이에 턱을 괸 노인까지 삼대가 어우러진 여러 가족이 잔치를 벌이듯 흥겨워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출국장을 나오는 승객을 쫓고, 차려입은 여인들이 설렘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세상의 나비가 죄 몰려들 것처럼 혼곤했다. 어쩌면 이들이 기다리는 승객은 나와 함께 온 청년들이 전부일지 몰랐다. 그런데 나는 인천에서 이들의 사정이 나와 달리 곤란해질 거라며 자본주의 셈법을 내세웠다. 이치에 어긋나진 않다고 해도 나의 동병상련 속에도 편견이 있었던 건 아닐까. 13년차 이민자였던 그때, 어머니도 나처럼 마이너리티 감성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이북내기’라 불리는 속에 들어찬 모멸감이 있었는지.

며칠 전 동네 친구인 은혜씨에게 ‘네게 이민은 어떤 거야?’라고 물었다. 은혜씨는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구나!’라고 답했다. 유학생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은혜씨, 남편이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 초등학교 고학년인 두 딸에게 서툰 한국어로 다시 시작하자고 하기가 머뭇거려졌다. 남편도 경력을 쌓고 싶어 해 귀국을 미뤘다. 그리고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삶의 질서가 머무는 이 땅의 리듬 속에 굳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비자 종류가 바뀌었다. 집을 장만했다. 그때 은혜씨를 덮친 생각이 ‘아! 내가 여기서 죽겠구나…’였던 것이다. ‘머물다 갈 사람에서 사는 사람으로’ 심리적 이민을 겪은 은혜씨는 도망쳐야 하나 하는 생각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나도 십여년 전 두번째 이민을 겪었다. 강가를 걷고 오는 길, 등이 활처럼 휜 노인이 앞마당에 엎드려 구근을 심고 있었다. 땅을 쓸어 흙을 돋우고는 양동이를 짚고 후들거리며 일어나 몸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여기 있다가 저렇게 만년을 보내겠다 싶었다. 그때는 싫었다.

‘도망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왜 했을까? 그리움이 사무쳐서는 아니다. 계속 이대로 살아야 하나, 싶었다. 남의 땅에 적응했지만 곁방에 세 들어 사는 느낌이랄까. 몸을 사리고, 느닷없이 초라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세세한 말까지 통하고, 보름달을 보면 떠오르곤 했던 이들이 사는 곳이자 나의 수완이 통할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은혜씨와 나는 아직 살고 있다. 은혜씨는 학교 일을 시작하고, 가치 있다고 여겼던 일을 동료들과 도모했고, 나는 밥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는 동네 친구들이 늘어가며 남의 땅이 아닌 ‘우리 동네’에서 살게 됐다. 인종 너머 서로에게 감탄하는 친구가 늘어갔다. 사는 곳의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게 됐다.

그리움이 서러움을 부르지는 않는다. 서러움이 오히려 내 속에 그리움이 있음을 확인시키고 때론 우울로도 이끈다. 나도 너와 같고 너도 나와 같다는 헤아림이 곁에서 번질 때, 그리움은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그 감정으로 순하게 동행하는 것 같다.

스리랑카에서 아리야라트네를 만나고 오는 도중 시골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집으로 초대했고, 장미가 그려진 본차이나 커피잔에 한국 커피믹스를 타서 내게 두 손으로 건넸다. 찻숟갈을 받침에 두고도 커피믹스 봉지를 얇게 접어 잔 안에 빠뜨려 놓았다. 그가 내민 한국어능력시험 문제지에 답을 표시해 주며 한국 다녀와 집 짓고 장가도 들었는데 왜 또 그 험한 곳으로 가려느냐고 말렸다. 마침, 노동자 권리 대목이 나오길래 반드시 외워야 한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이 길어지자 청년은 답만 알려 달라고 사근거렸다. 물러서지 않자, 진땀이 나는지 모자를 벗고 땀을 닦았다. 머리가 휑했다. 외국인 노동자라고 독한 약품을 쓰게 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년이 맞받아쳤다.

“사장님. 사모님, 사장님 아들, 우리 다 같이 일했어요. 똑같이 해요. 다들 나 기다려요.”

삶이란 모르는 사이 머문 곳에 옴짝달싹 못하게 붙박이기도 하고, 느닷없이 내쳐지기도 한다. 스리랑카행 비행기를 함께 탔던 드네쉬는 여전히 한국에서 살고 있다. 딸을 둔 아빠가 됐다. 그가 있는 곳도 내가 있는 곳도 소소한 재미가 일렁이는 삶의 터전으로 지속되면 좋겠다.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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