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비전에 경의” 제2 전성기 싱가포르, 리콴유를 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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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간판 기업 지멘스를 이끄는 롤랜드 부시 회장이 지난달 15일 싱가포르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시 회장은 싱가포르에 2억유로(약 2800억원)를 투자해 산업 자동화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완공되면 일자리가 400여 개 새로 생긴다.
당초 부시 회장은 이 공장을 중국에 짓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공급망 다각화를 위해 싱가포르가 낫다는 사내 자문위원회의 반대를 수용해 방향을 틀었다고 독일 언론들이 보도했다. 부시 회장은 “싱가포르가 많은 나라와 무역 협정을 맺고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했고, 세드릭 나이케 지멘스 디지털 인더스트리 부문 CEO는 “싱가포르는 정치가 안정돼 있고 인재도 풍부하다”고 했다.
최근 싱가포르 진출을 확대하는 기업은 지멘스뿐만이 아니다. 영국 가전업체 다이슨은 작년 싱가포르로 글로벌 본사를 이전한 데 이어, 지난 5월엔 이곳에 차세대 배터리 공장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소니뮤직은 작년 3월 동남아 시장 공략을 위해 싱가포르에 지역 본사를 설립했다. 베트남 최대기업 빈그룹의 전기차 제조사인 빈패스트도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며 법무·재무 본부를 싱가포르로 옮겼다.
싱가포르가 동남아시아의 경제 중심지로 탄탄한 입지를 굳힌 지는 오래됐지만, 최근 2~3년 새 ‘기업하기 좋은 곳’으로 각광받으며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다. 특히 올해는 번영의 초석을 다진 리콴유(李光耀·1923~2015) 초대 총리의 탄생 100년을 맞아 한발 더 도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아시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리 전 총리가 닦아놓은 ‘기업 국가’로서 경쟁력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시아 금융 허브’ 자리를 놓고 경쟁해온 홍콩이 중국화하고,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기업·돈·인재가 싱가포르로 몰려드는 흐름이 뚜렷하다.
1인당 GDP 8만달러 시대 열어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큰 넓이에 인구는 600만명도 채 되지 않는 도시 국가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말레이반도 끝의 어촌이었고, 1965년 독립했을 때 1인당 GDP는 517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0~80년대 리콴유 전 총리 집권 시절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뤄내며 한국·홍콩·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떠올랐다. 지난해에는 1인당 GDP가 8만달러를 돌파해 8만2808달러에 달했다.
요즘 싱가포르에는 해외 투자가 물밀 듯 들어온다. 싱가포르경제개발청(EDB)에 따르면 작년 싱가포르 내 고정자산투자는 225억싱가포르달러로 전년(118억싱가포르달러) 대비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152억싱가포르달러)과 비교하면 50% 증가했다. 전체 투자액에서 싱가포르 투자자 비율은 9%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미국(51%), 유럽(21%), 중국(9%) 등에서 들어왔다.
특히 반도체 분야 투자가 두드러진다. 미국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는 작년 12월 4억5000만달러 규모의 새 공장을 착공했고, 프랑스 반도체 소재 업체인 소이텍은 4억유로를 투자해 기존 웨이퍼 공장을 두 배로 키우기로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작년 확보한 투자 프로젝트가 모두 구현되면 1만7000여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자리가 늘어나자 팬데믹 당시 주춤했던 인재 유입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월 5000싱가포르달러(약 480만원) 이상을 받는 전문가에 발급하는 고용패스(EP) 대상자는 작년 18만7300명으로 전년보다 16% 증가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올 9월부턴 IT 전문가를 우대하는 내용의 새로운 비자 제도를 도입해 기술 인재도 적극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해외 기업 몰려와 빈 사무실 없어
해외에서 기업과 인재가 몰려들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사무실 공실률이 증가하는 와중에도 싱가포르에서는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활황을 보이고 있다. 실제 싱가포르의 사무용 빌딩에서는 공실을 찾기 어렵다. 내년 개장 예정인 48층짜리 대형 오피스 빌딩 ‘센트럴 블러바드 타워’는 이미 절반가량의 임차인을 확보했다. 작년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3만4000㎡(약1만평) 사무실 공간을 사용하기로 계약을 미리 체결했고,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9300㎡(약 2800평) 규모 다섯 층을 임차해 기존 사무실을 확장 이전할 예정이다. 부동산 정보업체 나이트프랭크는 “2021년 이후에만 200개 넘는 외국 기업이 싱가포르에 새로운 지사를 설립한 효과로 중심업무지구의 올해 2분기 오피스 임대료가 작년 2분기보다 5.8% 올랐다”고 했다.
싱가포르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금융 분야에서의 입지도 한층 강화됐다.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 산업 경쟁력을 측정하는 국제금융지수에서 싱가포르는 작년 9월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 1위, 세계 3위로 올라섰다. 스타트업 분야에서도 순위가 껑충 뛰었다. 시장조사업체 ‘스타트업 지놈’의 스타트업 생태계 순위에서 올해 싱가포르는 작년보다 10계단이나 높은 8위를 기록했다.
‘홍콩의 중국화’로 반사이익
싱가포르는 ‘아시아 금융 허브’를 놓고 경쟁하는 홍콩이 ‘탈(脫)중국’ 현상으로 입지가 축소된 반사이익도 얻고 있다. 2020년 국가보안법 시행을 계기로 홍콩이 ‘중국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일부 현실로 나타난 데다, 지난 3년간 강력한 코로나 봉쇄가 이어지자 서방의 관점에서는 홍콩의 매력이 시들었다. 홍콩에 아시아 거점을 둔 미국 기업은 2020년 282개에서 이듬해 254개로 줄었다. 작년까지 4년간 홍콩 노동 시장을 떠난 인구만 22만명에 달한다.
중국 당국이 ‘공동부유(共同富裕·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앞세우자 중국 자산가들은 싱가포르로 이동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패밀리 오피스(부유층 가족의 자산 관리를 전담하는 회사)는 2020년 말 400개에서 작년 말 1100개로 급증했다. 작년 싱가포르의 자산 100만달러 이상 고액자산가 순유입도 2019년의 두 배 수준인 2900명에 달했다. 이들 상당수가 중국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우 첸 홍콩대 금융학과 석좌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중국이 점점 더 반기업적이고 반개인적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중국 억만장자들이 싱가포르로 옮겨가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미·중 갈등이 커지면서 싱가포르는 중립 지대로 각광받고 있다. 심지어 중국 기업조차도 싱가포르로 향하는 추세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국의 짧은 동영상 앱 틱톡은 글로벌 본사를 싱가포르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두고 있고, 중국 패스트패션 업체 쉬인은 재작년 말 중국 난징 본사를 싱가포르로 이전했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 기업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제재 움직임까지 일자 싱가포르에서 일종의 ‘국적 세탁’에 나선 것이다.
리콴유가 설계한 ‘기업 국가’ 저력
싱가포르의 최근 약진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힘입은 측면이 크지만, 리콴유 초대 총리 시절부터 쌓아온 기초 경쟁력이 만개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영연방 자치령이던 1959년부터 31년간 재임한 리 전 총리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경제 분야에는 철저히 자유를 부여해 개방성과 다양성을 갖춘 국가 구조를 설계했다. 실용성을 갖춘 정부 조직, 기업 친화적인 조세·고용 제도, 영어를 기반으로 한 이중 언어 정책, 항만·공항을 토대로 쌓은 물류 시스템 등으로 싱가포르를 ‘기업 국가’로 부상시켰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 5월 리 전 총리 탄생 100주년 기념 주화를 발매하며 그동안의 국가적 성공을 자축했다. 기념 주화를 발매한 싱가포르통화청은 성명을 내고 “지역의 무역항에서 글로벌 제조·비즈니스·금융 허브로 변모시킨 리콴유의 전략적 비전, 대담함, 불굴의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싱가포르는 영국 경제 분석기 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하는 ‘비즈니스 환경 순위’에서 15년 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싱가포르 법인세율은 17%(단일 세율)로 전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이고, 산업군·투자금액·고용창출 규모 등을 고려해 5년 동안 면제 혹은 5~10%로 감면해주기도 한다. 양도소득세와 상속·증여세가 없다.
추진력과 실용성을 갖춘 정부 조직도 경쟁력을 높이는 발판이다. 문기봉 아세안비즈니스센터장은 “실제 싱가포르 공무원을 만나보면 기업인인지 공무원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고 기업 마인드가 강하다”고 했다. 회의·행사를 준비할 때조차 겉치레보단 효율성을 먼저 따지고, 국가에 이익이 된다 싶으면 기업인처럼 딱 붙어 설득한다는 것이다.
인재도 풍부하다. 싱가포르는 인시아드경영대학원이 산출한 ‘2022 세계 인적자원 경쟁력지수’에서 세계 2위, 아시아 1위를 차지했다.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는 “싱가포르는 유연한 비자 발급 제도 등을 통해 외국 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파격적인 연구비 지원으로 대학에도 고급 인재를 유치하고 있다”고 했다.
물류 인프라는 세계 정상급이다. 해상 물류 요충지인 믈라카해협을 끼고 있어 천혜의 입지를 갖춘 데다, 개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프라를 쌓는 데도 공을 들였다. 현재 싱가포르항은 120국 600개 항구를 연결하는 해운 항로의 중심이고, 창이 국제공항도 100여 국의 380여 개 도시를 오가는 글로벌 항공 허브로 자리 잡았다. 동남아 시장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도 싱가포르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동남아GDP는 2020년 3조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에서 2027년 5조2000억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높은 대외 개방도가 변수
싱가포르가 극복해야 할 과제도 있다. 최근 호황은 집값과 월세를 큰 폭으로 뛰게 했다. 주택 임대차 시장에서 월세가 3000싱가포르달러(한화 약 290만원) 미만에 거래된 계약 비율은 올 1~4월 12%에 불과했다. 재작년만 해도 이 비율이 54%였다. 로이터통신은 “임차료가 엄청난 속도로 상승하면서 외국인 근로자가 싱가포르를 떠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코로나 봉쇄를 끝낸 홍콩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하면 자본과 인재의 싱가포르행이 주춤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홍콩은 지난 5월부터 패밀리 오피스가 주식·채권 등에 투자해 얻은 이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하고 있다. 작년 12월엔 2025년까지 10만명 이상의 전문 인재를 홍콩으로 데려온다는 목표를 세우고 자격 조건을 완화한 2년짜리 비자 제도를 신설했다.
글로벌 경기가 나빠지면 싱가포르 경제에 악재가 될 수 있다. 내수 시장이 작은 싱가포르는 GDP 대비 무역 비율이 337%로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데다, 외국 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금리 인상과 외부 수요 약화가 싱가포르 경제에 큰 부담을 주면서 올해 성장률이 시장 전망치를 밑돌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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