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이라는 말에 대하여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누가 진짜 과학적인가. ‘과학적’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과학적’이라는 말로 결정과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하고, ‘비과학적’이라는 말로 상대방 주장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두고 특히 심했지만, 다른 사안을 놓고서도 ‘과학적’이라는 말의 힘을 빌려 주장을 관철하거나 갈등을 종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과학적’이라는 단어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모두가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일까.
많은 경우 ‘과학적’은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측정, 계산, 분석, 예측의 방법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그런 방법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묘사하는 말로도 쓰인다. 하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서 정부가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 거기에는 이 모든 작업을 실행할 수 있는 예산, 장비, 인력을 가진 집단의 자신감이 배어 있다. 지난 화요일 오염수 관련 24차 일일 브리핑에서 정부는 수산물 방사능 검사 167건과 국민신청 방사능 검사 104건 결과가 모두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해양 방사능은 108개나 되는 해역에서 측정하고 있고 “‘신속분석법’을 사용해 분석 기간을 기존 2개월 이상에서 4일 이내로 단축”할 예정이다. 해수욕장 20곳의 방사능도 다 안전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이는 정부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규모의 값비싼 ‘과학적’ 활동이다. 이때 ‘과학적’은 각종 자원을 투입해서 획득하는 전리품 같은 것이다.
돈과 시간과 인력이 들어간 연구 활동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과학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보편성, 재현 가능성, 투명성 등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특성들이다. 오염수 위험을 다루는 활동이 “임의의 제3자에 의해 검증되고 재현 가능한 것인지 따져봐야 비로소 과학적이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레시피의 투명한 공개”가 없다면 과학적 결론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방적인 주장”에 머물게 된다(물리학자 이종필). 또 “위험과 연관 관계가 불확실한 경우에는 판단을 유보하고 ‘잠재적 위험성’으로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는데도 “이를 ‘위험성 없음’으로 오인한다면 매우 비과학적인 태도”라는 지적도 있다(물리학자 최무영). 이때 ‘과학적’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갖춰야 할 신중함, 겸허함 같은 태도나 덕목의 문제로 확장된다.
‘과학적’이라는 말이 과학의 본질이나 과학자의 태도와 무관하게 단지 과학자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며 의뢰한 일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 원희룡 장관이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논란이 “전문가의 과학적 의견과 당사자인 주민들의 의사”를 통해 정리될 것이라고 말할 때(<월간조선> 인터뷰), 이 ‘과학적’에는 분석의 방법이나 과학자의 소신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지 않다. 그는 관련 유튜브 영상에서도 비슷한 관점으로 말했다. “타당성 조사 용역을 받은 이 전문 과학기술자들이 노선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대안이 나오게 된 겁니다.” 여기서 과학기술은 정치인이나 관료의 책임은 줄이면서 간편하게 받아서 쓰면 되는 용역 서비스다.
아마도 ‘과학적’은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 그 과정에서 얻는 데이터, 이를 수행하는 태도, 과학자에게 맡긴 일 모두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과학자들끼리 실험 결과를 토론할 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과학의 기초를 가르칠 때, 정치인이 국민에게 정책을 설명할 때 쓰는 ‘과학적’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도 괜찮다. ‘과학적’이란 말을 각 영역에서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할 때 지향할 만한 가치를 총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혼란의 여지는 별로 없다.
그러나 지금 ‘과학적’이라는 말은 공론장에서 함께 쌓아 올려야 할 가치가 아니라 서로 뺏거나 빼앗기는 대상이 돼버렸다. 내가 찬성하는 일에는 ‘과학적’이라는 완장을 채워주고, 반대하는 일에는 ‘비과학적’이나 ‘괴담’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논란을 피하거나 상대를 누르기 위해 ‘과학적’을 무기처럼 휘두르면 ‘과학적’의 여러 의미는 엇갈리고 충돌한다. ‘과학적’이 합의의 동력이 아니라 갈등의 징조가 될 때 과학은 사회적 의사 결정을 위한 제도로서 그 권위를 잃는다. 그건 과학에도 사회에도 좋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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