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연은 빛을 머금은 어둠…그게 그렇게 황홀하고 찬란하더라"
권순익 작가 인터뷰
고향 문경 탄광촌서 흑연 접해
미대 가서도 잊히지 않아
기와에 문지르고 수많은 점 찍고
다음달 12일까지 대만서 전시
별 하나 없는 밤하늘 같은 새까만 어둠. 하지만 조금만 각도를 틀면 어느새 어둠 속에 은은한 빛과 광택이 차오른다. 연필심에 주로 쓰이는 흑연이 가진 성질이다.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글로벌 갤러리 화이트스톤 전시장은 지금 이런 흑연을 갖고 만든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 키만 한 높이로 쌓아올린 기와 겉면을 흑연으로 문질러 새까맣게 덮는가 하면, 캔버스에 짙은 녹음과 붉은 태양을 그린 뒤 그사이에 작은 틈을 만들어 안을 흑연으로 채웠다.
모두 권순익 작가(64)의 작품이다. 아시아에 6개 지점을 갖고 있는 화이트스톤이 일본 건축 거장 구마 겐고가 디자인한 대만 메인 전시장을 한국 작가에게 내준 건 이번이 처음.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래서 오히려 예술가들이 ‘주무기’로 쉽게 내세우기 힘든 흑연으로 권 작가는 어떻게 대만 미술계를 홀렸을까.
탄광촌에서 마주친 찬란한 어둠
“빛을 머금은 어둠.” 최근 화이트스톤 대만 전시장에서 만난 권 작가는 흑연을 이렇게 불렀다. 처음엔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빛을 만나면 반짝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다. 그가 흑연에 마음을 뺏긴 건 어렸을 적 탄광촌에서였다.
“제 고향인 경북 문경엔 탄광이 있었어요. 명절날 부모님과 고향에 내려갈 때면 차창 너머로 탄광촌 근처에 널린 석탄이 보였는데, 그게 그렇게 황홀했더랬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갈 때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검은빛. 성인이 돼서 미대에 입학한 뒤에도 흑연이 계속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는 흑연을 예술로 만들기 시작했다. 때로는 단색의 면들 사이에 틈을 만들어서 흑연으로 가득 채우고(틈 시리즈), 때로는 한옥에 쓰이는 기와를 가져다 흑연을 문질러서 독특한 마티에르(질감)를 더했다. 그중에서도 100호 사이즈의 큰 캔버스에 수많은 점을 가득 올려낸 ‘무아’ 시리즈는 화이트스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오랜 시간 앞에 서서 감상하는 작품이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확연히 다른 작품이어서다.
점들이 만들어낸 흑연의 변주
권 작가의 작업 방식은 독특하다. 우선 캔버스에 단색으로 밑칠을 한 뒤 그 위에 아크릴 물감과 흙을 섞어서 만든 ‘몰딩 페이스트’로 입체적인 점을 쌓아올린다. 점이 다 마르고 나면 그 위에 흑연을 문질러 색깔을 입힌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커다란 하나의 원이나 사각형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은은한 빛이 감도는 수많은 점을 마주할 수 있다. 흑연으로 뒤덮인 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이다. 어떤 점들은 유리창에 빗방울이 쭉 흘러내리는 것처럼 서로 붙어 있는가 하면 어떤 점들은 따로 떼어져 있다. 그 안에는 불교적인 정신이 깔려 있다.
“불교에 ‘무아(無我)’라는 개념이 있어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고, 그 순간순간이 축적돼서 비로소 나를 만든다는 뜻이죠. 그래서 더욱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점 하나하나를 만들 때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순간에 몰입하고, 재료와 하나가 되려고 했죠.”
“내게 제일 좋은 길은 낯선 길”
그의 말처럼 작업 과정은 ‘수행’에 가깝다. 권 작가는 매일 오전 5시면 서울 자택에서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작업실로 향한다.
그곳에서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3시간씩 작품 앞에 앉아 있는다. 한 작품을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적게는 수시간, 많게는 수일에 걸쳐서 흑연을 문지른다. 흑연이 갖고 있는 어둠과 빛을 완벽히 구현하기 위한 행위다.
널찍한 전시장을 가득 채운 24점의 작품을 돌아본 뒤 권 작가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어떤 수식어가 붙었으면 좋겠느냐고. “글쎄요. 예술가에게 제일 좋은 길은 낯선 길이라고 생각해요. 흑연을 꾸준히 사용하긴 했지만 그 안에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변주한 것처럼요. 어떤 언어에 갇히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각하고 도전하는 그런 예술가가 되려고 합니다.” 전시는 오는 8월 12일까지다.
타이베이=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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