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고 돌아본 ‘일본 속 백제’ 아스카 시간여행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시골 마을 ‘아스카’, 고대엔 일본 수도
6세기 백제 장인들이 절 등을 세운 곳
고구려와 비슷한 다카마쓰총 벽화와
백제계 호족의 거대한 돌무덤 등 볼만
‘나라’라는 지명은 한국어 ‘나라’와 같고
‘아스카’ 뜻은 고한국어 ‘아사달’과 비슷
왕실 신궁 ‘가시하라’도 사실 고한국어
“반도와 일본 일부는 고대엔 한 언어권”
코로나19 이후 일본을 찾는 한국 여행객이 폭증하고 있는데, 그중에 나라(奈良) 지방의 고대 도시 아스카(飛鳥)를 여행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아스카는 교토가 수도가 되기 이전 6~7세기 일본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다. 백제를 통해 대륙의 선진문물을 왕성하게 흡수해 건설한 ‘신도’(新都)였기에, 백제는 물론 가야, 고구려, 신라 등 한반도 도래인이 많이 모여 살았다.
고대 한반도의 향기를 맡고 싶다면 아스카에 가보라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은 뒤로 아스카는 필자의 오랜 버킷리스트의 하나였다. 처음 아스카역(飛鳥驛)에 내릴 때 마치 오래전 떠나온 고향 마을에 돌아온 듯한 감흥이 일어 기분이 묘했다. 일본 전역에는 ‘아스카’라는 지명이 수십 군데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아스카라고 하면 한자로 ‘明日香’(명일향)이라고 쓰는 이곳(‘먼(遠) 아스카’라고도 한다. ‘가까운(近) 아스카’는 오사카에 있다)을 가리킨다.
일본 역사서를 보면, 나라 지방은 일본 최초의 왕국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살기 좋은 동쪽 나라’(東美地)로 알려져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도래인들은 한반도 남부, 지금의 부산이나 김해 등지에서 대마도를 거쳐 북규슈(九州)에 상륙해 서서히 일본 열도로 퍼져나갔다. 그중 세토내해(규슈, 시코쿠, 혼슈의 세 섬에 둘러싸인 바다)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해 오사카만에 상륙한 세력이 세운 야마토 정권이 국가로서 일본의 시초라고 한다.
태양신을 믿는 초기 도래인 집단이 바다에서 멀리 이코마산(生駒山. 오사카시 동쪽에 있는 높이 642m의 산으로 오사카시와 나라현의 경계를 이룬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이 신천지를 ‘日의 本’이라고 여긴 데서 일본 국호의 기원을 찾는 역사가도 있다.
일본의 성씨 중 ‘日下’(일하)는 ‘히노시타’가 아니라 ‘구사카’라고 읽는다. 해 뜨는 이코마산의 오사카 쪽 산 아래 지명이 구사카(草香)라는 것을 알면 왜 ‘해 아래’(日下)를 구사카로 읽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이코마산을 넘으면 동쪽으로 넓은 나라분지가 펼쳐지고 남쪽으로 아스카가 나온다.
오사카나 교토에서 아스카로 가려면 긴테쓰 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교토에서 철도로한 시간 정도 걸리는 아스카무라(明日香村)는 인적마저 드문 한적한 농촌인데, 들판에 드문드문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아스카역에 내려 지도를 한 장 얻고 자전거대여소로 가서 자전거를 빌렸다. 버스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돌아보려면 자전거가 필수다. 아스카 여행 덕분에 필자도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누벼본다.
역에서 나와 직진(209번 도로)하면 답사 코스가 시작된다. 먼저 다카마쓰총 고분과 히노쿠마 오미아시신사 등을 둘러본 다음, 덴무·지토덴노 부부릉을 거쳐 쇼토쿠 태자의 출생지라는 다치바나데라(橘寺)와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데라(飛鳥寺), 그리고 고대 무덤 유적인 이시부타이(石舞台)를 돌아보는 코스를 택했다. 좀 더 멀리 아스카자료관과 고대 왕성인 후지와라쿄(藤原京) 터까지 가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체력과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유감이었다.
아스카데라는 일본 최초로 정식 가람 형태를 한 절이다. 당시 실질적인 집권자인 백제계 소가(蘇我)씨가 불교 수입을 기념해 지은 장대한 규모의 절인데, 현재는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백제로부터 절 건축을 아는 승려를 비롯해 탑 박사, 도자기 박사, 그림 박사 등 공사를 담당할 장인들을 초빙해 588년부터 20년에 걸쳐 지었다고 한다. 백제계 장인이 만들었다는 아스카 대불(구리 불상) 점안식에는 왕과 소가씨를 비롯해 100여 신료가 모두 백제 옷을 입고 의식을 거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소가씨는 왕실의 외척으로 4대에 걸쳐 조정을 쥐락펴락한 백제계 호족(신라계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본 학계는 도래계 설 자체를 부정한다)인데,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한 유적이 이시부타이고분이다. 7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거대한 횡혈식 석실고분은 봉분은 없어지고 천장을 덮는 거대한 돌 등 30개의 큰 화강암(총 2300t) 더미로만 남아 있지만 그 크기만으로도 당시 소가씨의 엄청난 위세를 짐작게 한다. 무덤 주인은 소가씨 집안의 대수장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소가씨 권력은 우마코의 손자 이루카(入鹿)가 암살되면서 몰락했다. <일본서기>에는 “가라히토(韓人)가 한정(韓政)으로 인하여 구라쓰쿠리(이루카)를 죽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도래계 사이 세력갈등이 추동한 사건 같다. 잘린 목이 원통해서 날아다녔다는 이루카의 목무덤이 아스카데라 옆에 있다.
1973년 발굴된 다카마쓰총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고분벽화가 발견된 곳이다. 고구려벽화의 영향이 뚜렷한데, 무덤 주인이 고구려인인지 백제인인지는 여전히 확정되지 않고 있다. 가로 2.66m, 세로 1m, 높이 1.1m의 사방벽과 천장에 사신도, 별자리, 인물상 등의 채색화가 그려져 있다. 다카마쓰총 고분 유적 뒤에 있는 히노쿠마 유적은 백제인 ‘이마키’(최근에 온 기술자)들의 거주지 유적이다. 그들의 조상을 모신 오미아시신사와 씨사인 히노쿠마사 터가 당시 사정을 전하고 있다.
나라라는 지명은 우리말 ‘나라’와 뜻과 소리가 똑같아 신라계 도래인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스카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의 ‘安宿’(안숙)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지만, ‘해 뜨는 땅’이라는 의미가 사실에 부합한다고 본다. 아스카는 보통 한자로 飛鳥(비조)라고 쓰는데, 이곳 나라현의 아스카는 ‘明日香’이라고 쓴다.
明日(명일)은 내일, 아침의 뜻인 ‘아사’, 香(향)은 고을 향(鄕)의 ‘카’와 소리와 뜻이 통한다. 즉 明日香이라고 쓰는 아스카는 ‘해 뜨는 땅’, 또는 큰 도읍, 왕도를 뜻하는 우리말 고어 ‘아사달’과 사실상 같은 형태의 조어이다.
그런데 ‘飛鳥’는 ‘도부도리’라고 읽어야 하는데 어째서 똑같이 아스카라고 읽을까. 일본어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우리말로 풀면 비교적 간단하다. 훈독하면 ‘날(飛), 새(鳥)’ 즉 “날이 새는 것”이다. ‘날이 새니’ 아침(明日), 또는 내일(來日)이다. 비조는 또 새가 나는 것이니 ‘새 날아(나라)’와도 통한다. 일본에서는 본래 이곳 아스카를 ‘飛鳥明日香’으로 붙여서 불렀다고 한다. ‘새 나라(비조) 새 도읍(명일향)’쯤의 의미를 담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당시 섭정이던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수입해 아스카를 중심으로 국가를 일신하려 했던 점을 생각하면 나름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돌아오는 길에는 교토~아스카 간 환승지인 가시하라에서 내려 가시하라신궁에 들렀다. 가시하라신궁은 일본 왕실이 조상 격인 진무(神武)덴노를 모시는 신궁이어서인지, 입구에 대형 일장기가 펄럭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무덴노는 ‘가시하라’(橿原)에 도읍을 세우고 야마토(大和)왕국을 건국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시하라는 ‘크고 새로운 도읍’이란 뜻의 고한국어 ‘큰 소부리’에서 나온 것이다. ‘소부리’는 백제에서는 ‘사비’(현재의 부여), 신라에서는 ‘서라벌’(금성. 현재의 경주)의 뿌리어이다. 고대에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생각보다 훨씬 가깝고 넓은 공동의 언어권이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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