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허준이 연구소’ 예산
한국계 수학자로는 처음으로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의 이름을 딴 ‘허준이 수학난제연구소(허준이 연구소)’가 19일 문을 열었다. 허준이 연구소는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인 허 교수의 업적을 기리고 제2의 필즈상 수상자 배출을 목표로 내세웠다.
개소식에는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이광형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 등 과학계의 유력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제2의 허준이를 찾겠다’ ‘20년 안에 필즈상 수상자가 또 나온다’ 등 희망찬 발언도 이어졌다.
그런데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정적만 남아 있는 객석처럼 개소식이 끝난 뒤 허준이 연구소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허준이 연구소는 기존의 고등과학원에 있던 수학난제연구센터를 확대·개편하면서 만들어졌다. 문제는 말이 확대·개편이지 정부의 지원은 제자리걸음이라는 점이다.
허준이 연구소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추가된 예산은 8억원 정도가 전부라고 한다. 허준이 연구소는 제2의 허준이를 꿈꾸는 젊은 수학자들을 모아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허준이 펠로십을 운영한다. 젊고 능력 있는 수학자들에게 매년 1억원 정도의 연구비를 지원하는데 첫해 목표였던 4명을 채우지 못하고 3명에서 그쳤다. 첫 해인 만큼 꼼꼼하게 평가를 한 것도 있지만 예산이 부족한 것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
허준이 연구소는 수림문화재단 건물 한 켠을 임대해서 쓰는데 8억원의 예산으로는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비와 임대료 내는 것도 벅차다고 한다. 그나마 이 예산도 허 교수와 수학계가 함께 발로 뛰면서 ‘개인기’로 확보한 것이다. 기존에 있던 예산은 수학 난제 연구에 쓰이기 때문에 허준이 연구소의 새로운 사업에 쓰기도 힘들다. 이종호 장관을 비롯해 과학계의 유력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남은 건 말의 성찬 뿐이다.
개소식이 끝나고 기자들을 만난 허 교수는 허준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와 국제 협력을 진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국내 수학자들과 교류하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허준이 연구소 차원에서도 전 세계 수학 석학들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교류하는 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수학계에서 변방 취급을 받던 한국이 허준이라는 명품 브랜드를 만나면서 단숨에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할 예산이 없으면 결국 도돌이표가 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이 30조원에 달하는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다며 과기정통부를 질타했다. 윤 대통령의 질타 이후 과기정통부는 국가 R&D 예산 배분을 재검토하고 있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윤 대통령의 지시를 따를 수 있을지 현장에선 혼란이 크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지시한 국가 R&D 예산 개혁의 해답이 궁금하다면 허준이 연구소를 보면 된다. 윤 대통령이 강조한 건 청년 연구자에 대한 지원 강화와 국제협력 활성화였다. 젊고 유능한 연구자들이 모여서 국제협력을 모색하는 곳이 허준이 연구소다.
그런데 30조원이나 된다는 국가 R&D 예산 가운데 허준이 연구소가 고작 8억원을 더 받는 것도 힘들었다. 허 교수 같은 석학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녀야 가능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윤 대통령이 국가 R&D 예산이 허투루쓰인다고 질타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부디 허준이 연구소가 허 교수의 바람대로 수학계의 국제적인 협력의 장이 됐으면 좋겠다. 청년 수학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며 난제에 도전하는 무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허준이 연구소라는 이름에 걸맞는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허준이 연구소가 우리나라 수학계의 제2의 성장을 위한 새로운 도전과 혁신의 요람이라는 이종호 장관의 축사가 부디 말의 성찬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종현 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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