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년·대성동 이야기] ② "개성까지 걸어 심부름 다녔어"

최재훈 2023. 7. 20.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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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이전부터 대성동 마을에 살았던 최고령 박필선 할아버지

(파주=연합뉴스) 최재훈 기자 = "어릴 때 개성은 마을 어른들 심부름하러 다니던 곳이었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어."

올해 나이 아흔. 박필선 할아버지는 주민들이 대부분 고령인 대성동 마을에서도 최고령이다.

대성동 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부터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10대 시절은 해방과 분단, 6ㆍ25 전쟁이 관통했다.

할아버지와의 인터뷰를 위해 대성동 마을 방문을 추진했으나 유엔군사령부의 허가가 나지 않아 장단면 사무소에서 만나 생생한 대성동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1933년생인 박필선 할아버지는 대성동 마을이 분단 이전까지는 주로 쌀농사를 하는 평범한 마을이었다고 소개했다. "예전에는 대성동이라는 이름이 없었고 근처에 태성이라는 옛 성이 하나 있었는데, 전쟁 때 들어온 미군들이 태성을 대성이라고 부르면서 대성동이 된 거야."

해방 이후 38선이 그어지며 지정학적으로 접경지 마을이 됐지만, 할아버지는 크게 체감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이기도 하고, 그때는 TV도 없었으니 뭘 제대로 몰랐어."

대성동 마을 최고령 박필선 할아버지 [촬영 노승혁 기자]

남북 간 전쟁이 터졌을 때도 이 마을은 조용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갑자기 마을 인근 도로에 인민군들이 그득하더라고. 그래서 뭔가 터졌다는 걸 알았지."

피난을 갈 수도 없었다고 했다. "전쟁이 터진 사실을 알기도 전에 인민군이 먼저 왔는데, 어떻게 피난을 가?"

인민군들이 주민들을 괴롭혔냐고 묻자 "그런 것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농사를 짓는 생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정전후 남한의 DMZ(비무장지대) 유일 마을이다 보니 정부가 체제 선전에 많은 신경을 썼다고 기억했다. "정부가 건물도 세우고 했어. 선전을 위해서."

가장 불편한 것은 통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통행증이 있어 필요하면 (민통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주둔한 미군 부대가 물자 수송을 위해 나가면 그때 겨우 차를 얻어 타고 나갈 수 있었지"라고 했다.

하지만 나가더라도 더 큰 문제는 마을도 돌아오는 것이었다. 민통선 안쪽으로 복귀하는 미군의 차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 일정이 기약이 없었다고 한다.

"길게는 일주일 정도 (민통선) 밖에서 기다렸다고 보면 돼. 기다리는 동안 친척 집에 머물거나, 그것도 여의찮으면 여관에서 지냈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

대성동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주민들 [독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비무장 지대 내부에는 대성동 초등학교가 유일한 학교다. 대성동에서 태어난 어린이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민통선 밖으로 나가야 하므로 10대 초반부터 유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대성동 어린이들의 숙명이다.

"우리 집, 옆집 할 것 없이 한창 부모의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의 애들을 떠나보내는 데, 다들 마음이 좋지 않았어. 그렇게 나간 아이들의 손자·손녀가 벌써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가 됐어."

대성동 마을은 지금도 군인들의 통제를 받으며, 야간에는 인원 점검까지 한다.

이러한 환경이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에 한사코 고개를 저으신다. 70년을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새삼스럽게 느낀 점은 '접경지 주민 특유의 초연함'이었다.

북한의 무력 도발 등 남북 관계가 악화하면 국민들은 접경지 주민들의 안위를 걱정하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분단된 한반도의 최전선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며 산전수전을 겪으며 이골이 나서일 것이다.

이런 대성동 마을 주민들도 남과 북이 확성기로 선전 방송을 할 때는 소음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2016년 무렵이었나. 정말 시끄러웠어.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하기도 어려웠어. 북한에서 나오는 방송 소리가 유독 시끄러웠는데 다 자기들 체제 선전하는 내용이었지"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인터뷰에 동행한 대성동 마을 주민은 "민통선 내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과의 좋은 관계 유지를 중요시해 군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일 이야기는 잘 안 하는 경향이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대성동 마을 태극기 [독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터뷰를 마치고 할아버지는 통일촌 마을의 한 식당에서 순두부 한 그릇을 드셨다.

식당 건물 처마에는 시골에서도 보기 어려워진 제비 둥지가 가득해 민통선 내 청정 환경을 자랑하는 듯했다.

코로나19 이후 접경지 안보 관광이 재개된 데 따라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들이 통일촌의 명물인 콩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도 보였다.

담담하게 이 모습을 쳐다보던 할아버지는 "교통 문제 말고는 별로 바라는 게 없어. 접경지에 살고 있지만 생각은 다른 대한민국 국민과 똑같아"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마을로 향했다.

jhch79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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