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대 여성 아이돌 세대론에 가려진 개성 [K콘텐츠의 순간들]

김윤하 2023. 7. 2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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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에서도 세대론이 대세다. ‘4세대 아이돌’로 범주화되는 여성 그룹의 성장세가 뚜렷하다. 새 시대를 대표하는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채롭게 ‘나’를 이야기한다.
데뷔 5년 차 있지(ITZY)는 4세대 아이돌의 메인 키워드인 ‘나’에 집중하는 흐름의 물꼬를 텄다. ⓒ연합뉴스

어딜 가나 세대론이 빠지지 않는 요즘이다. 셋 이상만 모여도 이모·삼촌에서 조카뻘까지 한 세대로 묶어 이야기를 푸는 데 여념이 없는 사이, 케이팝에서도 세대론이 주요 안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새로운 것을 납득시키는 데도, 모르는 사람에게 슬쩍 아는 척하기에도 범주화만큼 유용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습성에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케이팝 어휘가 바로 ‘4세대’다. 최근 몇 년간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특히 신인 여성 그룹을 묶어 부르기에 이보다 좋은 수식어는 없었다. 어딜 가나 이전과는 확실히 뭔가 좀 다르고, 지금의 유행을 선도하는 게 분명한 이들이 한데 묶여 ‘4세대 아이돌’ 소리를 들었다. 한번 흥을 탄 사람들은 늘 그렇듯 ‘적당히’를 몰랐다. 4세대로 불리는 그룹들이 제대로 폭죽을 터뜨리기도 전에 ‘5세대’가 들썩였다. 말이 된다면 뭐든 캐치프레이즈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케이팝의 조급한 특성이 제대로 발휘된 순간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4세대조차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5세대 운운은 너무하지 않나 싶은 찰나, 뮤직비디오 하나가 떨어졌다. 4세대 아이돌의 메인 키워드인 ‘나’에 집중하는 여성 그룹의 물꼬를 튼 걸로 유명한 그룹 있지(ITZY)의 신곡 ‘벳 온 미(BET ON ME)’였다. 누가 뭐래도 난 나라고, 난 그냥 내가 되고 싶다고 주문처럼 외던 데뷔곡 ‘달라달라’ 이후 4년이 지나 있었다. 어느새 데뷔 5년 차가 된 이들은 잠시 떠났던 방황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다시 ‘나’ 앞에 섰다. 남들과는 다른 내 모습에 한없이 들떠 있던 그때 그 모습이 아닌, 다시 한번 나에게 모든 걸 걸어보겠다는, 두렵지만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가겠다는 다짐을 나지막이 읊조리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세대로 온통 흐려졌던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동안 4세대 이야기를 하며 진심으로 신이 났던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짧지 않은 케이팝 역사 속,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발화와 표현으로 주목받는 여성 그룹의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 그룹마다 뚜렷한 개성이 있었고, 제작진에서 멤버들까지 전력투구해 만든 결과물에서는 대세만이 내뿜을 수 있는 기개가 가득했다. 여성 그룹은 음원과 대중성이라는 말도 먼 과거의 언어가 되어 대형 팬덤을 거느린 대형 여성 그룹이 하루가 다르게 속속 탄생했다. 여성 그룹 앨범 초동(발매 첫 주 음반 판매량) 100만 장도 이젠 더 이상 낯선 숫자가 아니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새 시대를 대표한다는 여성 그룹은 입을 모아 나를 이야기하고 나에게 집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나’는 무엇보다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지금의 세대와 공명했다. 셀프 브랜딩에 능하고 ‘부캐’ 하나쯤은 기본이라는 ‘요즘 애들’과 맥을 함께한 셈이다.

‘나’를 중심에 놓는 새로운 문법

그렇게 모든 게 ‘나’인 곳에서 만난 ‘벳 온 미’는, 이제는 눈부신 ‘나’에게 감탄하는 걸 넘어 하나하나의 ‘나’를 꼼꼼히 돌아봐야 할 타이밍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이 아는 내면의 깊은 어둠을 깨고 다 함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뮤직비디오 속 멤버들의 뒷모습에 가슴이 일렁였다. 온통 나를 비추는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종종 느끼는 가벼운 현기증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4세대 여성 그룹에 자주 붙는 수식어들이 떠올랐다. 잘한다, 아름답다, 당당하다. 하나같이 멋진 꾸밈말이지만, 시선을 살짝 돌려보면 이건 결국 피상적 외연에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일방적인 찬사일 뿐이었다. 좀 더 깊고 섬세하게, 그 속의 ‘나’를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했다.

현재 케이팝에서 ‘나’를 가장 뚜렷이 앞세워 활동 중인 그룹 가운데 르세라핌이 있다. 데뷔 후 각종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르세라핌은 그룹 이름, 음악, 퍼포먼스, 콘텐츠 등 여러 방면에서 멤버들과 제작진이 깊이 있게 나눈 인터뷰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5월 발표한 이들의 첫 정규앨범 〈언포기븐(UNFORGIVEN)〉은 지난 1년간 힘 있게 이끌어간 동일한 테마가 일단락 지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지켜온 내가 정말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의 시작점 같은 앨범이었다. 강렬한 퍼포먼스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후속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강해지기 위해 수없이 담금질한 ‘나’를 확인하고 확신에 차 내딛는 이들의 첫 발걸음 같은 곡이었다.

르세라핌은 현재 케이팝에서 ‘나’를 가장 뚜렷이 앞세워 활동하는 그룹 중 하나다.ⓒ연합뉴스

지난 5월 일주일 간격으로 미니 앨범을 발표한 에스파와 (여자)아이들의 ‘나’도 면밀히 살펴볼 만하다. 두 그룹 모두 앞세운 건 일련의 ‘퀸카’ 콘셉트다. 비록 겉보기는 흡사할지언정,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구성 요소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퀸카’ 속 ‘나’를 이끄는 건 프로듀서 전소연의 필살 히트 공식이다. 발매 뒤 한 달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음원 차트 1위를 달리고 있는 노래는 핫한 퀸카의 탈을 쓴 (여자)아이들의 대중친화력 그 자체다.

에스파의 ‘스파이시(Spicy)’ 속 ‘나’는 데뷔 이래 줄곧 머문 광야를 뒤로하고 실제 멤버 카리나, 지젤, 윈터, 닝닝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이했다. 가상과 현실 사이 혼돈에 빠져 있던 에스파의 ‘나’는 드디어 가상의 무엇이 아닌 실재(實在)로 등장해 생생한 매력을 선사한다. 온통 ‘나’로 꽉 들어찬 세상의 이야기를 각각의 색깔로 펼쳐나가는 아이브와 뉴진스는 아직은 두 발을 디딘 곳보다는 동화처럼 그려진 나름의 환상을 진한 필체로 그려 나가는 중이다. 이제 막 출발선을 떠난 이토록 다채로운 이들에게 세대론은 작아도 너무 작은 그릇이다. 이제야 비로소 나와 제대로 마주한 그들이 뛰기 시작했다. 아직도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많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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