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대신 ‘전업자녀’ 택한 중국 청년들
전업주부처럼 집안일·돌봄 등 가족 역할에만 전념
일부는 부모와 근로계약서 쓰고 노동시간 등 협상
중산층 부모 많아진 것도 영향…‘도피’라는 시각도
중국 항저우 다창에서 8년 동안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왕커(35·가명)는 지난 2월 퇴사를 결심했다. 체력소모와 경쟁이 심한 프로그래머 업계에서 35세면 임원 승진을 목표로 계속 일할지, 아니면 다른 업종으로 전직해야 할지 갈림길에 서는 나이였다. 왕커는 제3의 선택을 했다. 저장성의 부모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왕커는 “지금 이력서를 제출해도 여전히 일자리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집에서 돈을 벌고 효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리, 장보기 등 집안일을 하며 이따금씩 부업 삼아 온라인으로 대학생들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친다. 그는 “중국의 부모들은 노후를 위해 자녀 양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데, 자녀가 돌아와 부모를 돌보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으냐”고 말했다.
베이징의 대학을 졸업하고 톈진에 있는 소규모 기계제조업체에서 일하던 쩡위팅(25·가명)도 일자리를 잃고 산둥성 본가로 돌아왔다. 코로나19로 일자리를 구하기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뚫은 취업문이었지만 회사는 경영이 어려워졌다며 지난해 10월부터 부서별로 구조조정을 했다. 쩡위팅이 속했던 홍보팀도 전원 해고됐다. 쩡위팅은 아버지에게 한 달에 5000위안(약 87만원)을 받으며 집안일을 하고 있다. 부모 요구에 따라 공무원 시험 준비를 병행하고 있지만 진짜 꿈은 돈을 모아 어릴 적 꿈인 소설가가 되는 것이다. 쩡위팅은 비슷한 처지인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결론을 내렸다며 “나의 사회적 역할이 지워졌으니 가족의 역할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왕커와 쩡위팅은 홍콩 독립매체 단전매가 소개한 ‘전업자녀(全職兒女)’의 삶을 택한 청년들이다. 전업자녀는 청년실업이 극심한 중국에서 나온 신조어다. 회사에 다니지 않고 전업주부처럼 집안일과 돌봄 등 가족으로서의 역할에만 전념한다. 일부 전업자녀들은 부모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노동시간이나 조건을 협상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부모에게 마냥 의존하는 캥거루족과 다르다.
전업자녀의 출현은 극심한 청년실업과 가혹한 노동조건이 맞물린 결과이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16~24세 젊은이 3300만명 이상이 올해 구직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600만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중국 청년실업률은 21.3%로 역대 최고치였으며, 석 달 연속 20%대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7~8월 사상 최다인 대졸자 1158만명이 취업시장에 진입하게 되면 청년들의 일자리 상황은 더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루시 교수는 “전업자녀의 확산과 출현은 사회·경제 전체가 쪼그라들고 내리막길을 걷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미 직장생활을 경험한 청년들이 재취업 대신 ‘전업자녀’를 택하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베이징에서 게임개발자로 일했던 줄리는 “5~6년 동안 초과근무가 흔했다. 종종 아침 9시에 집을 나서 새벽 1시 이후에 퇴근하는 ‘워킹 데드’(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살았다”며 가혹했던 노동환경을 전업자녀 생활을 택한 이유로 꼽았다. 펑샹 중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단전매에 “청년들은 직장에서 좌절하며 역할과 정체성이 왜곡되고 삶에 실망한다”며 “직업이라는 단어는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아들이나 딸도 직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녀 역할 역시 직업이므로 임금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자녀를 부양할 수 있는 중산층 부모가 많아진 것도 전업자녀 출현 배경으로 지목된다. 관영 인민망은 “전업자녀 개념이 가능해진 것은 일부 부모에게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며 “여기에 부모가 자녀와 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겹치면서 ‘유연한 취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업자녀를 향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왕커는 어머니에게 “결혼은 안 할 거니?” “사회보험은 어떻게 할 거니?” “나이도 젊지 않은데 취업은 알아보지 않니?”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있으며,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고 했다. 전업자녀 생활이 일종의 도피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왕커는 자신이 더 이상 직장에 다니기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2022년 춘계 이직 관찰’에 따르면 지난해 35세 이상 구직자의 취업 수요는 전년보다 25% 증가했지만 면접 기회는 20% 줄었다. 에너지, 체력, 신기술 적응력 등을 이유로 35세 이상 채용을 선호하지 않고 인공지능(AI) 기술 등으로 대체하는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왕커는 단전매 인터뷰에서 모아둔 돈으로 부동산도 알아보고 있다며 “아들 노릇을 하다가 지치면 또 숨을 곳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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