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문뜩] 예비타당성조사의 수난
재건축이 집을 가진 이들의 로또라면, 예비타당성조사(예타)는 땅 가진 사람들의 로또다. 수도권에서 ‘경축 안전진단 탈락’이나 ‘재건축 조합 설립’ 같은 현수막이 돈을 부른다면, 지방에서는 ‘무슨무슨 사업 예타 선정’이라는 문장이 마법을 부린다.
지방에서는 땅에 붙은 도로가 있느냐, 그 도로가 4m냐, 6m냐로 적게는 몇배, 많게는 수십배씩 땅값 차이가 난다. 이런 마당에 고속도로나 철도 같은 국가 기간 교통망 사업 소식이 돌기 시작하면, 풍문만으로도 지역 전체가 들썩인다.
교통망 사업이라는 게 결국 접근성을 개선하는 사업이고, 접근성이 개선된다는 얘기는 어제까지 쓸모없던 땅이 하루아침에 금싸라기 땅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부자들은 물론, 자기 땅 한 뼘 없는 사람들도 혹여 집 주변에 나들목이라도 뚫릴까, 역이라도 생길까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이렇게 사업 자체가 근본적으로 물욕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만큼 나랏돈으로 우후죽순 사업을 벌이거나, 내 집 앞으로 노선을 끌어당기는 일을 막아보자고 문턱을 만든 것이 지금의 예타 제도다. 예타는 나라가 망할 뻔했던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도입됐는데 “대규모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의 타당성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준에 따라 사전에 검증하는 제도”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래서 예타는 국토교통부 같은 여타 사업 부처가 아닌 기획재정부가 주관한다. 기본적으로 사업 추진의 이익이 투입되는 비용보다 큰지를 ‘수치’로 따지기 때문에 문턱이 높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나름대로 국고 낭비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역대 정부나 정치권에서는 이 예타를 허물거나 우회해 표심을 얻으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부터 5년간 총 60조3000억원 규모의 사업 예타를 면제했는데, 4대강 사업의 경우 전체 예산 22조2300억원의 90%에 달하는 19조7600억원의 예타를 면제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23개 지역 사업에 대한 예타를 한꺼번에 면제했는데, 이 때문에 비용과 편익을 따져묻지 않은 24조원어치의 사업에 국고가 대거 투입됐다. 13조원 규모의 아동수당이나 코로나19 재난지원금까지 포함하면 문재인 정부의 예타 면제 사업 규모는 100조원을 훌쩍 넘는다.
이 같은 예타 우회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정부는 균형발전이나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을 위해 예타를 면제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여기서 ‘재난 대응’, 문재인 정부는 ‘균형발전’을 아전인수로 떼어내 천문학적인 예타 면제를 얻어냈을 뿐이다.
야당일 땐 매번 정부의 예타 면제를 힐난하지만 정치권이 일치단결하는 경우도 있다.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급물살을 탄 ‘가덕도 신공항’이 대표적이다. ‘지역 균형발전’도, ‘긴급한 대응’ 요건에도 적합하지 않았던 만큼 여야는 특별법을 만들어 “예타를 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을 끼워넣었다.
이처럼 말 많고 탈 많은 예타가 최근 불거진 고속도로 종점 변경 이슈로 다시 불타오르는 모습이다. 2년 전 예타를 통과한 서울~양평 고속도로(고속국도)의 종점이 갑작스럽게 변경되면서 논란이 일자, 국토부가 사업 자체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하면서다. 의혹의 출발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고속도로 종점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일가가 소유한 토지가 있는 지역으로 변경됐다는 것이다. 예타까지 끝난 마당에 노선이 변경된 시기도 절차도 모두 미심쩍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진 후 사업을 재검토하겠다는 결정도 결정이지만, 의혹을 해소하겠다며 쏟아내는 발언들이 더 황당하다. 노선 변경 배경에 의혹이 집중되자 이미 통과한 예타 노선을 두고 “경제성을 높이려고 만든 가안(임시안)”이라는 변호가 나오는가 하면, “(예타가 끝나면) 종점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발언이 쏟아진다.
나라 곳간을 지키는 최첨단 수문장 같던 예타가 일순간 허술하기 짝이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앞으로 과연 어떤 국민들이 예타가 꼭 필요하다고 납득할까.
무엇보다 재정건전성을 금과옥조로 내세우고 있는 윤석열 정부가 예타 노선 정도는 얼마든 변경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설명을 쏟아내고 있으니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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