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다양한 자연현상, 동일한 자연법칙서 비롯한다

기자 2023. 7. 2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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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로 정해진 중력법칙을 따라 행성 지구가 태양 주위를 오랜 시간 공전하는 동안, 정말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운 온갖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이렇게 내가 옮겨 본 유명한 마지막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나는, 고정된 중력법칙과 생명의 다양성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다윈의 통찰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의 다양성은 자연법칙의 단순한 동일성과 함께한다. 같아도 다를 수 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같지만 다른 예가 많다. 풀잎 위 빗방울은 둥근 구슬로 구르고, 쏟은 물은 바닥에 넓게 퍼진다. 크고 작은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은 물리학의 에너지가 정한다. 작은 빗방울의 모습은 중력이 아닌 전기력이 정한다. 표면적이 작을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빗방울은 둥글게 뭉쳐 구른다. 커다란 물 덩이의 모습은 전기력이 아닌 중력이 정한다. 지면에 가까울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쏟은 물은 납작 엎드려 바닥에 퍼진다. 정확히 같은 전기력, 정확히 같은 중력이 작용해도 물 덩이의 크기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된다. 똑같은 물리학이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똑같은 진화의 법칙이 작용해도 실로 다양한 생명이 만들어진다. 다양한 자연현상이 동일한 자연법칙에서 비롯한다.

생물학의 유전적 부동의 부동(浮動)은 부동산의 부동(不動)이 아니다. 시냇물 위 나뭇잎이 둥둥 떠(浮) 휘휘 움직이는(動) 것처럼,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가 변하는 것이 유전적 부동이다.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표현하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것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다. 유전적 부동은 다르다.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없어도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를 만들어낸다.

흰 돌, 검은 돌, 색깔만 다른 바둑알이 각각 10개씩 담긴 주머니를 생각해보자. 바둑알 하나를 마구잡이로 꺼내, 같은 색 하나를 보태 두 개를 다른 빈 주머니에 넣자. 이 과정을 10번 반복해 바둑알 20개가 담긴 두 번째 주머니를 채우자. 이를 또 여러 번 되풀이해 세 번째, 네 번째 주머니로 이어가보자. 마지막 주머니의 속사정은 어떨까?

눈 질끈 감고 하나를 꺼내 같은 색 둘을 다음 주머니에 담는 과정은, 우연에 의해 선택된 개체가 다음 세대에 두 개체의 자식을 낳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때, 희고 검은 색에는 생존과 생식 확률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쩌다 우연히 주머니에서 흰 바둑알이 검은 바둑알보다 손에 몇 번 더 잡혔다면, 다음 세대 주머니에는 흰 바둑알이 더 많아진다. 최종 주머니에는 흰색만 가득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색에 따른 생존 확률의 차이가 없어도, 유전적 부동이 집단 내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로 이어져 진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자연선택은 다르다. 아무 바둑알 하나를 눈 질끈 감고 고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만약 흰색이면 바둑알 하나만, 검은색이면 두 개를 두 번째 주머니에 담는 실험을 생각해보자. 여러 번 이어가면, 결국 검은색 바둑알만 가득한 주머니가 등장한다. 희고 검은 차이에 따라 자손의 개체 수가 달라지는 자연선택의 원리다. 자연선택과 유전적 부동은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 변화를 마찬가지로 만들어내지만, 유전적 부동은 표현형의 차이에 눈감는 중립선택이다. 유전적 부동이 생물 종을 멸종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어쩌다 등장한 흰색만 담긴 주머니가 검은색만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경우다. 이때 다음 세대는 바둑알이 멸종해 텅텅 빈 주머니가 된다.

유전적 부동은 집단의 크기가 작을 때 강해진다. 바둑알 100만개로 같은 실험을 진행하면,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상황을 보기 어렵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물리학자의 눈에, 유전적 부동은 크기가 작을 때 드러나는 물리학의 유한 크기 효과(finite-size effect)다. 또,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면 이후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속사정을 가진 주머니가 계속 이어지는 생물학의 유전적 고정(genetic fixation)은,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통계물리학의 흡수상태(absorbing state)다. 유전적 부동이 일으키는 유전적 고정을 생물학이 말할 때, 물리학은 유한 크기 효과가 일으키는 흡수상태를 본다. 물리학과 생물학은 같은 자연을 바라보는 결 다른 시선이다. 같아도 다르고, 달라도 같은 것이 자연과 과학의 참모습이 아닐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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