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정의와 인권의 맞대결을 위하여

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2023. 7.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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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맞서 싸우는 정의, 포용적 가치의 민주주의
진보-보수 정치싸움 아닌 두 이상간의 경쟁 보고파
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서양사상사를 조금만 들여다본 적 있다면 정의와 민주주의가 화합을 이루어 오지 못했음을 안다. 정의가 불의에 맞서 싸우는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가치라면 민주주의/민주정은 보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려는 포용적이고 열린 가치다. 양자는 모두 나름의 올바름을 추구하지만 서로 방향이 다르다. 바로 이 차이야말로 서구의 유구한 이념적 대결구도를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정치의 대결구도가 얼마나 원리적으로 부실한지를 헤아리는 가늠자가 된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사상 전통이 표방하는 정의는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할당해야 정당하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과응보의 윤리를 수반하는데, 각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가운데 정당한 행위에는 상을 주고 부당 행위에는 벌을 주며 책임과 이익은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고전고대의 ‘정의’ 관념은 이른바 ‘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인의 행복을 넘어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불의와 비타협적으로 싸울만한 탁월한 역량이 필요하며 이러한 자질은 오직 영웅에게만 주어진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의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철학적 지혜를 지닌 우월한 자여야 했다. 오직 그러한 지도자만이 법을 통한 지배를 실행할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이 말하는 법이란 실정법을 훌쩍 뛰어넘는 차원을 뜻했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의를 합법적인 것과 등치시키면서 실정법보다 상위에 있는 자연법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가 남다르게 탁월한 품성을 지녀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를 그리스어로 ‘아레테’라고 불렀다. 그것은 도덕적 품성을 넘어선 정치적 자질을 뜻했다. 그리스 사상을 계승한 고대 로마의 대표적 지성 키케로도 자연의 본성에 합치되는 법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모든 시민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정의롭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전쟁마저도 자연법에 근거할 때 정당하다고 말했는데, 이를 수행할 만한 영웅적 정치인의 자질을 라틴어로 ‘비르투스’라고 불렀다.

고전고대의 정의관은 다분히 영웅주의적인 특징을 지녔다. 그리스의 ‘아레테’와 로마의 ‘비르투스’는 모두 국가를 통치하는 영웅의 품성 내지는 역량을 뜻하는 말로, 그들의 용기 있는 행위는 실정법에 구속받지 않으며 도덕적 삶과도 조화를 이룬다고 여겨졌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민주적이지 않지만 정치가 기본적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고 풀기 힘든 난국을 타개하여 미래를 여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비해 어쩌면 민주주의는 긴급한 행위의 요구를 사람 수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자칫 정치의 영역을 실종시킬지도 모를 맹점을 지닌다.

키케로에게 긍지를 주었던 로마공화정이 제국체제로 나아가면서 세상 끝까지 확장된 제국의 보편적 질서가 영웅들의 정치적 역량보다 중요해진다. 스토아주의의 세계시민적 윤리학이나 그리스도교의 이타적 사랑관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된 환경에서였다. 선행과 자비는 어쩌면 정치적 무기력함의 표현일 수 있다. 19세기의 독일 철학자 니체가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에 관해 논하면서 강한 자는 마음껏 불의를 행하는 반면 오로지 약한 자들만이 도덕을 부르짖는다고 지적한 것은 지극히 고전고대적인 발상이었다. 서양사상사를 보면 고대 그리스발(發) 사상과 문화의 전통, 즉 헬레니즘의 경향이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결실인 인문주의는 고전고대의 세속적 영웅주의를 부활시킨 것으로, 그 사상적 적자인 마키아벨리는 정치가의 탁월한 역량, 즉 ‘비르투’를 강조했다. 그것은 운명의 변전 속에서 운명에 마냥 굴하기보다는 찾아온 기회를 거머쥐는 자유의지를 뜻했다.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단순한 권모술수가 아니라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한 고도의 상황인식과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이었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애초에 탈정치적이었다. 로마제국을 잠식한 만민평등의 그리스도교 윤리가 그러했고 유럽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적 계몽사상 또한 그러했다. 평등한 교회공동체는 신의 이름으로 정치를 억누름으로써 시민적 자유와 사회정의를 실종시켰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간의 시민의 권리 선언’은 지나치게 관념적이었기에 독단과 공포정치로 귀결되고 말았다. 모든 피지배자가 주권자라는 선언은 자칫 인민의 대변자를 참칭하는 독재자를 부르기 쉽다. 도덕적 이상론에 가까운 민주주의와 인권은 늘 모호한 상태로 멈추곤 했지만 우리시대에 이르러 전례 없는 정치적 역량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 다수의 횡포에 단호히 맞서는 소수자들을 우리시대의 영웅들이라 칭할 수 있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야말로 긴급한 정치적 사안이다. 이제 지긋지긋한 보수와 진보의 대결 대신 불의의 척결이라는 현실정치적 목표와 인권의 원대한 이상 간 치열한 맞대결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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