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90] 비처럼 음악처럼
이별의 순간에 아름다운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을 두고 비극적 낭만성이라고 일컫는다. 슬프지만 아름답거나 슬프도록 아름다운 상태를 뜻하는 비극적 낭만성은 대중가요에서 ‘비(雨)’라는 소재로 표출되곤 한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비가 설레는 첫사랑의 추억과 연결된다면, 대중가요에서 비는 이별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낭만적으로 덧칠하는 데 일조한다.
1936년에 남인수가 강문수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비 젖는 부두’는 비 내리는 날 부두에서 임을 그리며 눈물 흘린다는 비극적 낭만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초창기 노래다. 비는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에서 어머니와 헤어져야 하는 슬픔을 심화하고,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에서는 떠난 임을 생각나게 한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라는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건네주고 싶다는 다섯손가락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라는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등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분위기가 지배적인 노래다.
실제 빗소리로 시작하는 정인의 ‘장마’에서는 “넌 나의 태양. 네가 떠나고 내 눈엔 항상 비가 와. 끝이 없는 장마의 시작이었나 봐”라며 이별의 슬픔을 장맛비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론 가혹하기까지 하다. 이별의 슬픔과 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낭만적 정서를 빚어내는 데 비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 대중가요와 달리, 현실에서 비는 때로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다. 비비언 그린(Vivian Greene)이 “인생이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지만 “칠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속담이 현실을 대변하는 요즘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호우로 발생한 피해가 처참하기 때문이다. 1972년에 서울에 대홍수가 나면서 정훈희가 노래한 ‘빗속의 연인들’이 ‘눈 속의 연인들’로 제목이 바뀐 일이 떠오르는 날들이다.
지금 전 세계는 기상 이변으로 고통받고 있다. 기상학자들은 여러 통계 수치를 들면서 지구가 얼마나 아픈지 경고하며, 예측 불가 영역으로 진입했다고 우려한다. 환경과 생태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체절명 과제로 다가온 오늘 “나는 매일매일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제인 구달(Jane Goodall)의 말을 되새긴다. 더 큰 불행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부디 지치지 않기를 바라며, 이 비로 고통받는 분들께 깊은 위로의 마음을 보낸다. 이 비 그치면 비가 음악처럼 우리에게 다시 낭만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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