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실리콘밸리은행은 실패한 모델일까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한 지 넉 달이 지났다. SVB의 파산 과정은 디지털 뱅크런의 위험, 이사회와 경영진의 리스크 관리 소홀, 당국의 감독 실패 등 여러 문제를 드러냈다. 동일한 사태의 재발 방지와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리가 이 시점에서 되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SVB는 과연 실패한 모델인가. 즉 SVB는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고, ‘내재적으로’ 취약한 서비스모델이었던 것일까.
1983년 설립 이후 40년간 존속하고 성장했던 SVB가 금융시스템 내에서 수행했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너무 쉽게 망각할 이유는 없다. 부채구조의 편중이나 자산-부채 간 만기 불일치 관리 소홀 같은 문제로 파산에 이르게 됐지만, 자산 운용 측면에서 SVB가 보여준 장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우리가 배워야 할 모범사례로 평가받았던 이유는 이들의 서비스모델, 특히 벤처대출(venture debt) 모델이 지닌 차별성과 장점 때문이었다. 벤처투자가 가장 발달한 나라인 미국에서조차 매우 의미 있는 사업모델로 인정받아왔다.
우선 벤처대출은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그들의 특허, 영업권, 미래 현금흐름 등을 담보로 하거나 신용으로 제공되는 대출이다. 그 자체로는 전통적인 은행이 제공하기 어려운 고위험 대출인 셈이다. 기업의 이력도 일천하고, 객관적인 재무정보나 물적 담보가 부족한 벤처기업의 경우 기존 은행의 엄격한 여신심사 과정을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SVB는 이렇듯 정보 부족, 기업가치 평가의 어려움 등의 문제를 벤처캐피털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지분투자와 벤처대출을 융합하는 형태로 자금을 공급했다. 특히 벤처대출은 벤처기업들이 시장에 본격 진입하거나 확장을 시도하는 중·후기 단계에 필요한 규모확장(scale up)용 자금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두 번째로 SVB는 자금 공급 외에도 벤처기업의 성장단계별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델을 확립했다. 창업 초기 기업들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보육, 초기자금 지원, 마케팅 서비스에서 출발해 후기 단계 내지 기업공개 이후에 제공되는 자금관리, 외환서비스, 자산관리 등 종합적인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벤처기업의 실패는 단순히 기술경쟁력이 부족해서 나타나기보다는 부실한 경영관리, 판로개척 실패, 마케팅 실패 등 다양한 비재무적 요인들로 인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해주는 자문 및 지원서비스는 벤처기업의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효한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금융부문이 수행해야 할 경제적 역할 중에서 산업혁신과 미래 유망산업에 대한 자금중개와 지원은 필수적이다. 그동안 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지난해 말 기준 벤처펀드 투자 규모는 총 10조7000억원으로 2015년(2조6000억원)에 비해 4배가량 증가했다. 이러한 투자자금 중에서 정책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2015년 42.5%에서 지난해 25.3%로 감소했다. 통상 정책성 자금이 민간투자를 구축하는 효과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투자 총량은 크게 늘었으나 투자펀드당 규모는 300억원 미만, 건별 투자 규모 또한 20억원 수준으로 상당히 적다. 벤처기업들이 창업 후기에 필요로 하는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는 후속투자의 비중이 낮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니콘기업이 1029개인 데 반해 우리나라 유니콘기업은 14개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러한 대규모 후속투자의 어려움과 연관이 있다. 또한 경영자문, 고객 유치, 네트워크 소개 등 비금융서비스 제공 역할 또한 미흡하다.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은 경험이 있는 기업 중 80%가 자금투자 이외에는 특별한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우리도 경쟁력 있는 벤처캐피털을 키우고 금융회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한국형 벤처대출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이와 연계해 다양한 비금융 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델을 발전시킬 방안은 없을지 고민해볼 일이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