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세계관이 내리는 시집
걸그룹 뉴진스를 프로듀싱한 민희진 대표가 아트디렉터로서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이 (‘아티스트’와) ‘세계관’이었다는 점은 새삼스럽지 않다. K팝, 예능, 장르문학을 가리지 않고 최근 콘텐츠에서 결정적 셀링포인트인 세계관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사건과 요소로 만들어진 가상세계’(이지향, <세계관 만드는 법>)라는 뜻으로 통용되며 무엇보다 연속성·개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에서 어떤 세계관으로 돌입하기 위해선 대뜸 던지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있잖아, 지금부터 내가 지어낼 세상에는”…. 문보영의 시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학동네, 2023)에 실린 첫 시의 첫 구절처럼 말이다. 혹은 이런 시작도 좋다. “이런 상상을 해봤어.” “나 방금 영감이 떠올랐어.” 마침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냥한 애인도 있으니까 아무려나 좋은 것이다. 이 시집은 시 한 편마다 이상하거나 웃기거나 무서운 세계관이 하나씩 설정된, 무수한 세계관의 방으로 이뤄진 건축물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노크하면 이런 세계가 열린다.
①극장에 오직 나의 삶과 똑같은 공포영화만 상영되는 세계관. 화장실에 잔뜩 묻은 피를 발견하곤 너무 무서워 극장으로 달려가 공포영화를 관람해도 거기엔 내 삶의 공포가 그대로 상영된다. 다만 극장은 내 옆구리에 붙어있어 나는 마음만 먹으면 가짜 공포와 진짜 공포를 스위치할 수 있다. 공포 자체에서 탈출할 수는 없어도 “진짜 공포에서 가짜 공포로 도망가기”에는 언제든 성공할 수 있다면 어쩐지 근사하고 다행스럽지 않은가? (‘옆구리 극장’)
②머리카락에 감각세포가 있어서 자를 때마다 통증을 느끼는 세계관. 다른 사람과 달리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신체적인 고통에 더해 10만개의 머리카락만큼의 고통을 더 느껴야 한다. 이발을 할 때마다 마취를 하지 않으면 몸이 잘리는 아픔에 시달려야 하지만 이 고통은 이 사람을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지구상에 이 사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걸.(‘10만개의 느낌’)
③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3초가 걸리는 세계관. 사람이 눈을 깜빡이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0.4초라지만 여기서는 7~8배 느린 셈이다. 심지어 나이가 들수록 눈 깜빡이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져서 80세 노인은 10초까지 걸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노인을 비웃거나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시간 혹은 죽음에 탁월하게 적응하는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긴다. “이상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지쳐 있는 존재다.”(‘적응을 이해하다’)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는 개념이 다듬어진 배경에는 누구도 초월적인 시야에서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깔려있다. 세계관을 가진다는 것은 주어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으로 세계를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인 노발리스가 말했듯 “세계는 끝없는 합의의 결과이며, 세계관은 우리 안의 다양성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이 작은 시집에 기발하고 재밌는 세계관이 무수하게 들어있다는 사실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하나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상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진짜 공포가 덮쳐오면 가짜 공포로 도망가 위로받기도 하고, 아무에게도 머리카락이 잘리는 고통을 공감받을 수 없어 외로워도 하다가, 눈을 아주 천천히 깜빡이는 동안 흘러가는 시간을 이해하면서. 우리에게 세계상을 주는 것이 과학이라면, 세계관을 주는 것은 언제나 상상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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