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가치외교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자유주의 국제연대’ 전선 국가들을 순방하던 윤석열 대통령은 7월 15일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하고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힘에 의한 현상변경과 침략에 반대하며, 동병상련의 유대 의식과 적극 지원 의지를 천명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 우크라이나를 직접 방문하여 지지를 약속했던 미 바이든 대통령, 독일 숄츠 총리, 일본 기시다 총리 등 주요국 정상들과 보조를 맞춰 자유주의 중추 국가로서 책임을 다하는 ‘가치외교’의 기치를 드높였다.
이틀 전인 7월 13일 독일 내각은 첫 ‘대중국전략’을 의결한다. 탈동조화(Decoupling) 대신 5월 G7 공동선언문에서 합의된 위험회피(Derisking)라는 톤-다운된 용어를 차용하고 있지만, ‘일당독재 체제의 이익에 따라 국제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을 체제 ‘라이벌’로 묘사하며 우려를 표명한다. 지정학적 거리도 상당하고 경제적 의존도 지대한 독일로서는 중국과 두터운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국내 경제계 등의 반발과 신중론을 극복하며 내린 큰 결단이었다. ‘다극 체제의 미덕’을 강조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더불어 미국의 진영 다지기에도 거리를 두어왔던 숄츠 총리도 트위터를 통해 협력이 필요한 부문에서도 ‘인권이나 법치, 공정경쟁 등 결정적 사안들을 항상 거론할 것’이라며 새로운 대중 접근법을 예고했다. 자유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의 ‘신 워싱턴 컨센서스(New Washington Consensus)’가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일각에서 한국의 가치외교는 국익외교와 상충 되는 냉전적 이념외교라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판은 전후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지탱해 온 자유주의 질서가 현상변경 세력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되면서 발생한 국제정치 지형의 거대한 지각 변동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다. 지난 30여 년간 권위주의 강대국들조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 가치들을 인정하며 공존을 추구했다. 이들도 자유로운 무역과 통항, 호혜적인 국제법 질서가 제공하는 공간을 활용하여 부와 권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체제를 넘나드는 실리외교가 힘을 얻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설리번이 4월 27일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뱉어낸 탄식 그대로 경제 통합으로 체제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제 중러 보이지 않는 현상변경 동맹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핵심 가치에 정면 도전하고 있다. 심지어 ‘역사적 속국,’ ‘대국·소국 위계’까지 운운하며, ‘평등한 주권국가로 구성된 근대국가 체제’의 당위성을 허물고 타국의 영토적 일체성마저 무력으로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안전을 보장받아 왔던 바로 그 생존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가 존 미어샤이머의 경고처럼 한국은 협박에 굴하는 쉬운 선택과 어설픈 헤징으로 “자신의 무덤 위에서 중국과 함께 춤”을 출지, 길은 험할지라도 국내적으로 총력을 결집하고 대외적으로 동맹을 다져나가며 주권과 민주주의 헌법정신 수호를 위해 단호하게 분투해 나갈지를 결정해야 하는 엄중한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현상 유지와 현상변경 희구세력 간 경계는 자유주의 가치의 북방한계선과 일치한다. 가치를 키워드로 방어적 국제연대가 결성되고 있는 이유다. 더구나 중러는 물론, 핵무장으로 생존을 위협하는 북한과 국경을 맞댄 한국의 지정학적 입지는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와 유사하다. 절박성 면에서 독일, 프랑스와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한 박자의 여유도 사실상 사치다. 존망이 시험받는 위기 국면에서 국권 수호, 동맹 강화보다 더 큰 국익과 실리가 있을까? 가치외교는 이념 게임이나 이상 추구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론적 선택이다.김진하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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