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쓰러져도 추모식은 계속…폭발서 살아나온 히틀러[그해 오늘]

이로원 2023. 7. 2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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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0일,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 독일 베를린 국방부(벤드러블록)에서 열린 독일군 신병 입대 선서식.

지난 2007년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와 독일군 신병 450명은 벤드러블록에서 열린 입대 선서식에서 군부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기리며 '독일 역사상 갖아 위대한 날 중 하나'로 선포하는 등 현재 독일에서 슈타우펜베르크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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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20일 독일군 참모 본부 내 히틀러 암살 기도 실패
수포로 돌아간 ‘발키리 작전’…쿠데타 가담자 4천여명 처형
독일 정부, 매년 7월 20일 이들 향한 추모식 주최
지난 해 불볕더위에 병사 쓰러지는 사고 발생하기도

[이데일리 이로원 기자] 2022년 7월 20일,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 독일 베를린 국방부(벤드러블록)에서 열린 독일군 신병 입대 선서식. 한 병사가 바닥에 엎드려 쓰러져 있다.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 건강한 젊은 군인마저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해도 이들의 추모식은 강행됐다. 지난 78년간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엄숙하게.

(사진=EPA 연합뉴스)
시간은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7월 20일 역시 무더웠다. 이날 히틀러는 라스텐베르크에 있는 참모 본부 부지 내의 나무 오두막에서 고위 참모들과 일일 회의를 주최했다.

“평소 때처럼 지하 벙커에서 회의가 열렸더라면…” 이때 베를린 출신의 참모 장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못내 아쉬움을 삼켰을 것이다. 안 그래도 히틀러에 대한 경비가 더 삼엄해진 상황에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아 회의 장소가 바뀌게 된 탓이다.

그가 가져온 서류가방 안에는 숨겨둔 폭탄이 들어 있었다. 지하 벙커에서 터진다면 훨씬 강한 파괴력의 폭발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작전은 차질없이 진행되어야 했기에 슈타우펜베르크는 자신이 들고간 폭발물 가방을 자연스럽게 회의 장소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후 그가 밖으로 나가며 회의장은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오두막이 무너지는 아비규환 속에서 장교 4명이 죽고 7명이 다쳤다. 그 가운데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만 입고 살아났다.

당시 히틀러가 죽었다고 생각한 슈타우펜베르크와 반란군들은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신속하게 상황을 장악했고, 슈타우펜베르크와 공모자들은 그날 밤 처형당했다.

히틀러를 암살한 뒤 1942년에 세워진 비상 계획 발키리 작전을 이용해 미국 및 영국과 종전 협상을 하려던 이들의 사활을 건 계획 또한 처참하게 무너졌다.

단 한번도 장교 부대나 독일군 전통 조직을 신뢰하지 않았던 히틀러는 공모자들과 그의 가족들, 동조자들을 모두 숙청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군 내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었던 에르빈 롬멜 역시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강요당했으며, 계급을 불문하고 수많은 장교가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체포되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이렇게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가담자 4000여명이 처형당했다.

(영화=‘작전명 발키리’ 스틸컷)
이후 독일 정부는 매년 7월 20일 당시 독일군사령부가 있던 벤드러블록에서 이들을 향한 추모식을 치러오고 있다.

지난 2007년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와 독일군 신병 450명은 벤드러블록에서 열린 입대 선서식에서 군부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기리며 ‘독일 역사상 갖아 위대한 날 중 하나’로 선포하는 등 현재 독일에서 슈타우펜베르크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2004년 7월 20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또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6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오늘날 독일군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이 나치 독재에 항거한 정신에 바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히틀러 암살 시도는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독재에 맞서고 나라와 인류를 야만적 폭력에서 해방시키려는 위대한 행동”이었다고 강조했다.

히틀러는 2차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벙커에서 자살했다. 소련군은 벙커 근처에서 불탄 히틀러의 시신을 발굴해 자국으로 가져갔다.

1945년 5월 소련 법의학 팀은 두개골에서 자살 흔적을 발견했고, 턱뼈가 히틀러의 치과 진료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1970년 KGB(국가보안위원회)는 턱뼈와 두개골 일부만 남긴 채 히틀러의 유골을 화장 처리했다. 이후 턱뼈와 두개골 일부, 피 묻은 소파는 소련 정보기관 깊숙한 곳에 보관됐다.

이로원 (bliss24@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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