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실업급여와 ‘시럽급여’
정당한 근로자 권리 폄하해선 안 돼
기금 고갈 막기 위한 개편은 불가피
재취업·직업교육 확대 가교 삼아야
‘맹인모상(盲人摸象)’이라는 말이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뜻으로,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나오는 일화에서 비롯됐다. 옛날 인도의 어느 왕이 코끼리 한 마리를 놓고 시각장애인 여섯에게 만져 보게 했다. 돌아온 답은 제각각이었다. 이빨(상아)을 만진 이는 무로, 귀를 만진 이는 키, 다리를 만진 이는 절구공이라고 주장했다. 등을 만진 이는 평상, 배는 장독, 꼬리는 밧줄 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성급한 일반화가 얼마나 큰 오류를 낳는지 알 수 있다.
실업급여를 손봐야 할 당위성은 인정한다. 1995년 고용보험제도를 도입할 때부터 예견된 문제다. 초창기 일정 근로경력과 ‘비자발적 사직’이라는 조건을 달아 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급 요건도 조금씩 바뀌었다. 실직 이전 ‘18개월 동안 12개월 이상 근로’에서 1998년 ‘12개월 동안 6개월 이상 근로’로 완화됐다. 실업급여 하한액도 생겨났다. 최저임금의 70%였던 하한액이 2000년 90%로 올랐다가 최저임금이 급격히 오르자 현행 80%로 조정됐다.
제도가 대폭 바뀐 건 문재인정부 시절이다. 2017년 ‘18개월 이내 180일 이상’이던 수급요건을 ‘24개월이내 180일 이상’으로 늘려 단시간 근로자도 실업급여 대상이 됐다. 지급 기간도 나이에 따라 3∼8개월이던 것을 4∼9개월로 늘렸다. 최저임금 근로자의 월소득(세후)이 180만원인 반면, 비과세인 실업급여는 185만원으로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골치 아프게 일하느니 실업급여를 받겠다”, “출퇴근시간, 식비 등을 감안하면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최근 5년간 실업급여를 3번 이상 반복 수급한 사례는 연 10만명이 넘고 매년 적발되는 부정 수급자도 2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실업급여 브로커’가 조직적으로 개입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같은 회사에서 24번이나 실업과 재취업을 반복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부정수급으로 적발돼도 80%는 벌금에 그치는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다. 실업급여의 재원인 고용보험기금은 한때 10조원이 넘었지만 지난해 6조4130억원으로 줄었다. 공공자금관리기금 차입금을 제외하면 3조9000억원 적자다.
신이 아닌 이상 적정 수준의 보험료와 하한액, 지급 기간을 산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실업급여가 근로 의욕을 저하시키는 걸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색안경만 끼고 볼 게 아니라 도덕적 해이를 막고, 불필요한 누수를 막아 제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 첫발은 실업자에 대한 ‘시혜’개념이 아니라 복지 측면에서 출발해야 한다. 타당한 논리와 통계로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말 한마디로 반감만 사서는 곤란하다.
실업급여는 원치 않는 실직에 따른 충격을 막아 내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다. 정부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에게 실업급여 제도 개선에 대한 필요성을 소상히 알리는 게 옳다. 실직자들이 재취업과 직업교육 확대로 가기 위한 튼튼한 가교가 될 수 있도록 실업급여를 근본적으로 정비해야 할 때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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