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 총리 지명 무산···‘개혁 열망’ 태국, 또 군부에 가로막히나

박은하 기자 2023. 7. 1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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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의 지지자가 총리 선출 투표가 진행되는 19일 방콕 의회 앞에서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AFP연합뉴스

민주화와 사회 개혁을 열망한 태국의 민심이 또 다시 군부가 장악한 의회와 사법부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지난 5월 총선에서 제1당이 된 전진당(MFP)의 피타 림짜른랏 대표(43)는 19일(현지시간) 치러진 의회 2차 투표에서 끝내 총리로 지명되지 못했다. 군부가 장악한 상원의원들이 림짜른랏 대표의 후보 지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해 표결 자체가 무산된 것이다. 헌법재판소도 이날 림짜른랏 대표의 의원 직무 정지를 결정해 지원 사격에 나섰다.

로이터통신과 방콕포스트 등에 따르면 이날 열린 제30대 총리 선출 2차 투표에서 전진당을 비롯한 8개 야당 연합은 피타 대표를 총리 후보로 재지명했다. 피타 대표는 앞서 지난 13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재적 의원 749명 중 324표를 얻어 과반 표 획득에 실패했지만, 전진당을 제1당으로 선택한 지난 총선의 민심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부가 장악한 상원의원들은 1차 투표에서 낙선한 후보를 다시 지명해선 안된다며 표결 거부에 나섰다. 태국은 선거로 뽑힌 하원의원 500명과 군부가 임명한 상원의원 249명이 함께 총리를 선출한다.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군부가 2017년 개정한 헌법에 따른 것이다.

피타 대표는 “현재 시스템에서 대중의 승인을 얻는 것만으로는 국가를 운영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상원의 승인도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인스타그램에 썼다.

의회의 총리 선출 2차 투표에서 야권의 총리 후보로 재지명된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가 19일 헌법재판소가 그의 의원 직무 정지 결정을 내리자 자신의 의원 신분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날 투표는 무산됐다./로이터연합뉴스

의회에서 피타 대표의 후보 지명 자격 여부를 둘러싸고 장시간 토론이 벌어지던 시각, 헌법재판소가 피타 대표의 의원 직무 정지 결정을 내리면서 상원 의원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앞서 선거관리위원회는 피타 대표가 언론사 사주나 주주의 공직 출마를 금지한 선거법을 위반했다면서 헌법재판소에 그의 의원자격 박탈과 직무 정지를 요청했다. 헌재는 이날 재판관 9인 전원이 이 사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며, 7명의 찬성으로 직무 정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피타 대표에게 15일 내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군부가 장악한 헌재와 선관위가 총리 선출을 앞두고 피타 대표의 손발을 차례로 묶은 것이다.

피타 대표의 총리행은 사실상 물건너 간 것으로 해석된다. 전진당은 왕실모독죄 개정, 징병제 폐지, 동성결혼 허용 등 파격적인 개혁을 표방하며 지난 총선에서 151석을 얻어 제1당을 차지했다. 총선 이후 전진당은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계열인 제2당 프아타이당(141석) 등 야권 7개 정당을 규합해 연립정부 구성을 추진해왔다.

차기 총리 후보는 제2당인 프아타이당에서 배출할 가능성이 높다. 피타 대표는 지난 15일 “제가 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프아타이당의 후보에게 총리후보직을 양보하겠다”고 밝혔다. 피타 대표의 총리직 수행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지만 연정을 유지하기 위해 양보하려는 것으로 읽힌다.

프아타이당의 스레타 타위신 의원이 지난 14일 차에서 내리며 인사하고 있다./EPA연합뉴스

프아타이당은 스레타 타위신(60)을 후보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경험이 거의 없는 부동산 사업가 출신으로 경제 회복에 대한 염원 등을 내세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재벌 출신 정치인이자 군부 쿠데타로 물러난 탁신 전 총리의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36)도 총리 후보로 유력하다.

프아타이당에서 총리를 배출하면 2014년 발발한 쿠데타 이후 9년간 유지돼 온 군정은 종식되지만, 개혁 정책은 상당히 후퇴할 것으로 예상된다. 프아타이당은군부와는 대립했지만왕실모독죄 개정 등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탁신 전 총리는 집권 중 부패 혐의를 받았으며 언론탄압 등 군부정치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프아타이당이 전진당을 배제하고 군부정당을 포함한 별도의 연정을 구성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지난 총선에서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전진당을 제1당으로 만들어 준 태국 시민들의 염원은 또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피타 대표의 앞날도 불확실하다. 태국 군부는 선관위와 법원을 앞새워 반군부 정치 세력을 와해시켜온 전력이 있다. 2019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전진당의 전신인 미래전진당(FFP)의 타나톤 중룽르앙낏 대표도 총선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헌재는 이듬해 정당법 위반으로 미래전진당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타나톤 대표 등 지도부 10명에 대해서는 10년간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당시 헌재 결정 직후 태국에서는 군정에 반대하는 ‘세 손가락’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다.

피타 후보의 총리 후보 자격이 박탈되자 이날 오후 수백 명의 시위대가 의회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대치했다. 2020년 태국을 뒤흔든 반정부 시위가 재개될 수도 있다. 트위터에서는 #피타 #헌법재판소 해시태그가 트위터 트렌드 최상위에 올랐다.

헌재의 피타 림짜른랏 의원 직무 정지 결정에 항의해 19일(현지시간) 태국 방콕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한 시민이 피타 대표의 초상화를 높이 들고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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