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폭우 속 청진형무소 파옥 사건 "일제 족쇄를 풀어라"

2023. 7. 19. 18: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14명 독립투사들, 옥중투쟁 끝에 과감한 탈옥 일경과 간수대 포위망에 대항해 끝까지 혈투 11명은 사망·체포, 3명은 포위 뚫고 탈출 성공 현장 모인 어린이들에겐 '최후의 말'도 남겨

요즘 전국이 폭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100년 전 7월 퍼붓는 폭우 속에서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청진형무소 파옥(破獄) 사건이다. 빗속에서 형무소를 부수고 탈출한 독립운동가 14명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본다.

1923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에 '비 퍼붓는 8일에 청진형무소 파옥 소동'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궂은 비가 그칠 줄을 알지 못하고 함빡 퍼붓는 지난 7월 8일 오후 2시경이었다. 조선독립사건으로 함경북도 청진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죄수 14명은, 자기 운명에 대하여 무슨 결심을 하였던지 일제히 단체를 지어 가지고 간수 외 1명을 난타하여 인사불성을 만든 후, 다시 숙직으로 있는 한(韓) 간수장 이하 몇 명과 맹렬한 격투를 행하여 필경은 간수의 패금(佩金) 3개를 빼앗아 가지고 뒷 대문을 깨친 후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당시 죄수 2명은 체포되었으나 그 나머지 12명은 간 곳이 묘연하므로 형무소는 물론이요 그곳 경찰서와 소방대까지 총출동을 행하여, 사방에 비상선을 치고 대수색을 한 결과, 죄수들이 그 부근 산속에 숨어있는 것을 알고 간수 일대(一隊)는 추적하여 그들을 체포하려 한 즉, 그들은 완강히 반항하여 죄수와 간수 사이에는 생명을 던지고 싸우는 무서운 격투가 일어났으며, 나중에 간수대는 함부로 총을 발사하여 그중에 4명을 쏘아 죽이고 5명은 체포하였는데, 체포한 5명 중에도 총에 맞아 중상을 당한 자가 3명이며 그 외 3명은 아직도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총소리와 간수들의 뛰고 닫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수천 명의 시민은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현장으로 모여들어 그 광경이 심히 비참하고 복잡하였다더라."

빗속을 뚫고 청진형무소를 탈옥한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청진형무소를 파옥 탈출한 14명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은 1923년 7월 14일자 조선일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사(卽死)자는 신대용(申大勇, 40)·최용익(崔龍翊, 27)·이정국(李政國, 37)이다. 체포자는 신예백(申禮伯, 30)·김동순(金東淳, 23)·임병윤(林秉允, 28)·최시홍(崔始弘, 46)·전인학(全仁學, 28)·이용학(李龍鶴, 24)·이영구(李永求, 27)·전승관(全承寬, 43)이다. 미체포자는 황용운(黃龍雲, 34)·유운경(劉運慶, 29)·전상봉(全相鳳, 37)이다.

이들은 '조선독립사건'으로 선고를 받은 14명이었다. 탈옥 과정에서 2명은 피체되었고 나머지 12명은 탈출했다. 하지만 일경과 간수대의 포위망에 갇혔다. 9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거나 피체되었다. 3명만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모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혁명가들이었다. 그 중 전일(전인학)은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북간도로 넘어가 광복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의 철수와 병사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유인물 5만 부를 배포하려다 일제 헌병대에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되어 5년의 징역형을 받고 청진형무소에 수감됐다. 탈옥 이틀 만에 체포된 전일은 징역 4년 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만기 출소한 전일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세 차례 체포되어 5년 넘는 징역을 살았다. 1934년 그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는 일제 간첩 혐의로 처형됐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하바롭스크 공원묘지에 쓸쓸히 방치되어 있다.

그들의 탈옥 경위는 1923년 7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청진형무소 안에 갇혀있는 죄수 중에 여러 해 동안 만주와 서백리아(西伯利亞) 일대에 표류하며 조선 독립 활동을 하다가 부자유의 철창 생활을 하던 제령 위반범이 많이 있는데, 그네들은 끝까지 뜻을 세우자는 결심으로 적유단붕우회(赤油團朋友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바, 파옥 사건도 이 단체로부터 발생한 일이요, 그 단체 중에도 전인학과 신대용의 주창(主唱)으로 생긴 일인 듯하다고 하는데 (중략) 그날은 일요일이므로 이것을 기회 삼아 가지고 즉시 달려들어서 간수의 차고 있는 칼을 빼앗아 머리를 치고 열쇠를 꺼내 감방문을 열어 제쳐놓고 한편으론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중략)"

이어 기사는 계속된다. "이때 안개는 사면(四面)을 가리고 맹렬한 비는 쉬지 않고 쏟아지는 중, 그 적유단원들은 최후의 용맹을 다하여 사방으로 흩어져서 죽기를 한하고 달아나는 뒤에는 총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그 근처 동리 사람들까지 모여들어서 사람의 파도를 이룬 동시에, 총에 맞아 죽는 사람, 서로 격투를 하는 사람, 일장의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중략) 이정국이 기운이 진(盡)하여 항거하지 못함을 기회 삼아 평야(平野)부장은 칼을 빼 이정국의 머리를 2~3차례 쳐서 목이 떨어지게 되는 때에, 철 모르는 아이들이 전후좌우 둘러서서 참혹한 광경을 구경하는데, 이정국은 입을 열어서 겨우 하는 말로 '이 애들아 어린 벗들아, 나는 최후의 한 말로 그대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노라. 너희는 나의 광경을 보지 말아라. 너희들의 시대는 일이 많고 더욱 큰 사업을 할 때에, 국민인 너희들에게 이러한 광경으로 겁나게 하는 것은 내가 심히 유감으로 아는 바이다. 너에게 행복을 주기 위하여 피를 끓다가 끝을 보지 못하고 명이 다하게 됨은 나의 큰 유감이다. 바라건대 어린 벗 여러분은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이상적 낙원에 생활하라'라는 말로 최후를 마쳐 버렸고, (중략)"

7월의 빗소리가 요란하다. 폭우에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이 빗소리보다 더 큰 울음소리를 낸다. 어쩐지 그 빗소리가 100년 전 청진형무소를 탈옥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한 맺힌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