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희영(가명)씨는 뇌병변장애인이다. 궁둥이를 끌어야 겨우 이동할 수 있고 혼자서는 대소변 처리를 못해 장애인활동지원사 영임(가명)씨가 종일 붙어 있다. 고혈압약을 복용 중이어서 방문할 때마다 혈압을 재는데 계속 낮게 나왔다. 혈압약을 줄일지 결정하기 위해 ‘24시간 활동혈압검사’를 했다. 특수한 혈압계를 차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루 동안의 혈압을 자동 측정하는 검사다. 긴장하지 않기 때문에 의료진이 잰 혈압 수치보다 10 정도 낮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희영씨는 오히려 10 정도 높게 나왔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검사 결과를 설명하는데 옆에 있던 영임씨가 이유를 알 것 같다며 이런 얘기를 한다. 희영씨가 혈압측정기를 차고 있던 날, 영임씨는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 했다. 대신, 시내에 사는 희영씨의 언니가 와서 돌봐줬고 이 때문에 평소보다 더 긴장했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남도 아니고 그래도 가족인데….’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검사했다. 이번에는 영임씨가 온종일 집에 함께 있었다. 놀랍게도 평균 혈압이 전보다 20 정도 낮게 나왔다.
검사 결과를 보며 나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가족은 점차 기능을 잃어가고 타인이 가족의 기능을 하는 시대가 왔다. 새로운 돌봄 가족의 탄생이랄까. 놀라운 결과였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나는 한달에 몇번이나 부모님 댁에 가보고 있나. 지금 우리의 부모님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밥상 위에 수저를 놓고 먹을 것을 챙기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 우리, 자식들은 아니다.
늘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 같은 가족이 지금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그 중심에 돌봄 노동자가 있고 그들의 99%가 민간업체에서 근무하며 거의 최저임금을 받는다. 반면 공공기관인 서울시사회서비스원(서사원)의 돌봄 노동자들은 최저임금보다 시간당 1606원을 더 받는다. 서울의 높은 물가를 고려해 서울형 생활임금을 적용한 조치이다. 그런데도 이 상황을 비난하는 글을 봤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서사원 원장. 서사원 돌봄 노동자들에 대한 그의 요구를 거칠게 표현하면 이런 말이다. ‘최저임금 정도만 받고 똥기저귀는 갈아주세요!’
그의 글을 읽으며 며칠 전 강의에서 만난 요양보호사의 얘기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제가 돌보던 홀몸 어르신 한분이 집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됐어요. 한밤중에 연락받고 바로 댁을 찾아가 그 어르신의 시신을 봤는데 그 모습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요.” 그는 울먹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제겐 남이 아니잖아요. 생전 모습도 자꾸 생각나고….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앞으로 이런 일을 얼마나 더 겪게 될까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힘들면 전 못 견딜 것 같아요.” 눈물을 뚝뚝 떨구는 그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돌봄 노동자는 돌봄만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돌봄 당사자의 죽음과 삶을 함께 경험한다.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할까. ‘없는 사람’에게는 잔혹하리만치 무자비한 우리 사회에서 아픈 노인과 장애인이 겪는 무관심과 차별을 함께 겪는다는 뜻이다. 요양보호사 마음속에는 수많은 노인들 삶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가족이라면서 그 가족을 돌보는 노동은 싸구려 취급하는 세상에도 밤은 온다. 오늘도 수많은 영임씨가 수많은 희영씨를 만나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니 잠든 뒤에도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이면 가끔 어디선가 깊은 강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마주한 누군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새로운 강이 흘렀다. 사회가 돌보기를 멈춘 아픈 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강이 흐를 것인가. 그리고 잠든 그들 곁에 몸을 뉘면서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돌봄 노동자의 마음속에는 또 어떤 강이 흐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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