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이름도 모르지만 계속 만나요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이명석 | 문화비평가
“다시 합창할 수 있어!”
친구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 몇년 전 지인의 권유로 아마추어 합창단 오디션을 봤고, 정말 노래엔 자신이 없었는데 ‘불행아’를 울먹이며 불렀더니 붙여줬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번 모여 입을 맞추는 시간은 너무나 소중했다. 고양이를 떠나 보낸 아픔과 덜컹대는 직업의 불안함도 지워줬다. 그런데 기나긴 마스크의 시간이 그걸 빼앗아 너무나 답답하고 괴로웠단다. 내가 축하를 전하며 말했다. “신기하네. 나 똑같은 말을 들었어.”
코로나 팬데믹이 깊어가던 2020년 7월 <비비시>(BBC) 웹사이트에 저널리스트 이언 레슬리가 ‘약한 연결의 우정’에 관한 글을 실었다. 그는 10년 동안 월요일 저녁을 아마추어 합창단 연습을 하며 보냈다. 단원들과는 가벼운 미소로 인사하는 정도이고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습이 끝날 즈음엔 활력이 살아나 월요일의 답답함을 떨쳐냈단다. 나 역시 10년 이상 일주일에 한번 스윙댄스를 추러 갔다. 시시콜콜 안부 나눌 필요가 없는 사람들과 눈으로만 인사한 뒤 가볍게 한두곡씩 춘 뒤 헤어졌다. 그런 사이가 의외로 좋았다. 우리 모두 몇년 간 그 소중한 기회를 포기해야만 했다.
‘약한 연결’이란 말은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 교수 마크 그라노베터가 1973년에 발표한 논문 <약한 연결의 강함>(The Strength of Weak Ties)에서 유래했다. 자주 만나고 대화하는 가족, 직장 동료, 절친 등 강한 연결보다는 간헐적인 만남의 약한 연결에서 아이디어나 기회를 얻기가 쉽다는 주장이다. 영국 에식스대 질리언 샌드스트롬은 이를 심리학에 적용했다. 그에 따르면 단골 카페 주인, 요가 교실 회원 정도의 약한 유대를 넓게 가진 사람의 행복감이 컸다. 이런 만남에선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소모가 없기 때문이다.
춤 이외에도 나는 여러 취미의 동호회, 워크숍, 파티를 주최하거나 참가해왔다. 그런데 지난 10년 간 사람들 사이의 점착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동호회원들끼리 해외여행도 가고 이삿짐도 날라주는 등 가족 이상으로 가까운 경우를 많이 봤다. 물론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강습에만 일회적으로 참가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다. 아예 주최 쪽에서 서로의 본명이나 연락처를 묻는 것조차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취미를 함께 하며 친밀한 우정을 쌓는 일이야 당연히 좋다. 단지 사람이 좋아 동호회에 함께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전통적인 끈적한 친밀함이 적지 않은 사람을 밀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실내 클라이밍에 푹 빠진 친구가 있다. 땀을 흠뻑 흘린 뒤 회원들과 뒷풀이하며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일도 즐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부상을 입어 몇달 쉬는데, 그 사이에도 술자리나 경조사에 참가하며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 혼란이 생겼다. 직장 인간관계에 지쳐 바위를 타며 평온함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제 취미모임에서도 선생과 선배의 비위를 맞춰야 하나?
어느 정도의 점착도가 좋은지, 정답은 없다. 다만 혈연, 학연, 뒷풀이연의 끈적함은 부담스럽지만,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서 행복감을 느끼는 마음도 알아주기 바란다. 어떤 이는 언제나 계산하고 이것저것 재야 하는 직장 내 정치에서 벗어나 초보들끼리 더듬더듬 배우는 ‘바보들의 시간’에 편안함을 느낀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집안일에서 벗어나 ‘일주일에 한번 밖에 나올 핑계’를 얻기도 한다. 매일 혼자 몬스테라의 잎을 닦다 몇포기 화분에 담아 벼룩시장에 들고 나가며 두근두근하는 마음도 있다. ‘제발 말은 걸지 마세요’ 생각했지만, 막상 ‘어떻게 키워요’란 물음에 방언 터진 듯 말을 쏟아낸다.
기나긴 마스크의 시간에 갇히자 절실히 깨달았다. 별거 아닌 줄 알았던 그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우리가 가벼운 미소를 나누던 시간은 절대 시간낭비가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서로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공동체의 시간을 보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어떤 순간들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 계속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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