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96>삼성반도체통신, 최첨단 기흥공장 착공
1983년 4월.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은 이날 반도체 사업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했다.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반도체사업 진출 선언문을 언론에 발표한 지 1개월여 후다.
삼성반도체는 이 사업계획서에서 반도체 생산 품목, 제품 판매 계획, 생산설비, 공장 건설, 매출과 이익계획, 반도체 공정도, 기계시설 명세도, 용도변경 신청 토지 현황, 건물 배치도, 조경 계획도 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삼성반도체는 계획서에서 “반도체기술 자립을 실천하기 위해 신규로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사업을 추진하고 1983년 신공장 건설에 착수, 5년 동안 1700억원을 투자하며 첨단기억소자와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연간 1억개 이상 생산해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2%와 4.5%를 달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삼성반도체는 “이를 위해 200만달러를 투자해서 미국 현지에 개발센터를 설립하고 첨단제품의 미국 내 판매를 위한 현지 법인을 설립해 반도체 판매 전진기지로 삼을 계획”이라면서 “반도체 사업 추진으로 첨단기술 자립, 고용 증대, 제품 수출로 말미암은 외화 획득과 수입대체로 국제 수지(5년 동안 12억달러)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반도체는 기존 제1공장 외 경기 용인군 기흥면 능서리 일대 33만㎡ 부지에 3개 라인의 VLSI 공장과 사무실 등을 1987년까지 건설하겠다는 야심 찬 구상도 덧붙였다.
삼성반도체는 이날 그동안 반도체 공장 건설을 위해 매입한 토지에 대한 용도 변경도 건설부에 신청했다.
삼성반도체가 신청한 용도변경 지역은 경기 용인군 기흥면 능서리 일대 95필지 52만5526㎡에 달했다. 이 지역은 산림보전 지역이거나 농지, 대지, 임야 등이어서 공장을 지을 수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토지 용도 변경은 삼성반도체 사업의 명운이 걸린 일이었다.
삼성반도체는 신청서 제출 후 용도 변경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했다. 직원들은 관련 기관을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반도체 산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삼성반도체가 신청한 토지 용도 변경 문제를 놓고 상공부, 건설부, 농수산부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기술발전과 경제도약을 위해 용도 변경을 허가해야 한다”는 상공부 측의 주장에 농림부 측은 “안그래도 쌀이 부족한 마당에 농지를 공장 부지로 용도를 변경해야 하느냐”고 크게 반발했다. 주무 부처인 건설부는 이 문제를 독자 결정할 수 없었다. 최종 결정은 대통령 몫이었다.
“반도체는 우리 산업의 쌀과 같다. 반드시 우리 힘으로 개발하자”며 반도체를 국가전략 산업으로 적극 육성하던 전두환 대통령은 6월 말 토지 용도 변경을 최종 재가했다.
건설부는 7월 5일 건설부 고시 214호로 국토이용계획 일부를 변경해 경기 용인군 기흥면 일대를 삼성반도체 공장 부지로 허가했다.
건설부는 변경 고시문, 변경결정 조서, 변경 결정 도면 등을 농수산부와 환경청 등 관련 부처에 통보하고 변경 내용은 7월 8일 관보에 실었다.
정부가 공장 부지를 변경하자 삼성반도체는 8월 12일 공장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다.
9월 12일 오전 11시 삼성반도체는 기흥공장 건설 현장에서 공장 기공식을 거행했다. 기공식에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채문식 국회의장,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건희 삼성 부회장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33만여㎡의 부지에 건립하는 이 공장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64kD램, 256KD램 등 반도체를 생산하고 4인치 및 5인치 웨이퍼를 연간 100만개 이상 처리할 수 있는 최첨단 자동설비를 갖춘다고 삼성반도체는 밝혔다.
이병철 회장은 초대 기흥반도체 공장장으로 삼성석유화학에서 근무하는 성평건 소장을 임명했다. 그리고 지상명령을 내렸다.
“6개월 안에 공장 건설을 끝내야 하네.”
성 공장장은 취임하자 '양질 시공, 공기 단축, 공사비 절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는 전 직원을 소집해 아래와 같이 강조했다. “반도체는 제품 수명이 짧고 엄청난 투자비가 들어갑니다. 우리는 기적을 이뤄 내야 합니다.”
삼성반도체는 휴일도 없이 24시간 주야 작업으로 불가능에 도전했다. 이병철 회장은 기흥건설 현장에 대형 상황판을 설치했다. 상황판을 보면 전체 공정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수시로 기흥 현장을 찾아 공사 상황을 확인했다. 그로 말미암아 현장 직원들은 24시간 긴장 속에 생활했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자서전 회고. “최종 선언한 사업계획에 따라 설계와 생산공정, 기계장비, 기술인력, 자금, 부지, 용수와 전력, 건설 등 과제를 골라 각기 담당자를 정하고 과제별 진행상황을 일일 회의에서 하나 하나 확인하고 독려했다. 기술은 미국 마이크론과 일본 샤프 중심으로 도입했다. 마이코론에서는 64KD램을, 샤프에서는 CMOS기술과 16KS램 기술을 들여왔다. 일본 반도체업계는 한국에 대한 VLSI 기술 제공에 불응했지만 샤프의 각별한 호의로 그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업계 중에서 샤프를 국익을 해치는 국적(國賊)이라고 혹평하는 업자도 있었다.” (호암자전)
반도체 생산에서 핵심인 기술 인력은 미국 반도체 회사와 연구소 등에 재직하고 있는 한국인 박사들을 유치했다. 가장 먼저 영입한 인물이 이임영 박사다. 이 박사는 미국 스탠퍼스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IBM연구소와 샤프전자 등에서 일했고, UC버클리 대학 전자공학과 교수를 지냈다. 이 박사는 삼성반도체 부사장과 초대 미주법인 사장으로 일했다.
이 박사는 미국 반도체 업체에서 일하던 이상준 박사, 이일복 박사, 이종길씨, 박용의씨 등을 영입했다. 이들은 미국 자일록과 인텔 등에서 재직하던 최고 반도체 인재였다.
삼성반도체는 그해 7월 미국 샌타클래라에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법인 설립에는 이윤우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개발이사가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이후 이병철 회장 지시로 귀국해 기흥공장 건설을 총괄했다.
미국 현지 법인 인력은 모두 35명 정도였다. 반도체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온 삼성반도체 기술자들은 이곳에 머무면서 마이크론사에서 힘들게 기술연수를 받았다.
그해 10월 29일 오후. 전두환 대통령이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을 방문했다.
전 대통령은 이건희 그룹 부회장과 김광호 반도체사업본부장 안내로 개발하고 있는 제품과 반도체 공정 등을 돌아보고 직원들은 격려했다.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회고. “전 대통령에게 '우리도 64KD램을 개발했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업체가 견제할 수 있어 아직 발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 대통령이 '그러면 절대 발표하지 마시오. 발표하려면 나한테 미리 보고하고 하시오'라고 말했어요.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64KD램 개발을 정부에 공식으로 보고하면서 발표는 늦추게 됐어요. 그 사이 일본의 견제에 대비해 시간도 벌었고요.”
전 대통령은 어디를 방문하면 늘 '애로 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물었다. 이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업들이 가장 기다리는 질문이었다.
김 전 부회장의 증언. “전 대통령이 이날 현황을 보고받고 '애로 사항이 있으면 말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반도체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장비를 외국에서 수입하는데 이 중 일본에서 수입하는 프로젝션 얼라이너 관세가 50퍼센트나 돼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전 대통령이 '세금? 세금은 당연히 내야지'라며 '그런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다'고 해요. 대통령께서 세금을 해결해 달라는 뜻으로 이해하신 듯 했어요. 그래서 제가 보충 설명을 했습니다. '대일무역 적자 때문에 이런 관세가 붙었습니다. 대일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면 우리가 사업을 잘해서 일본에 수출을 많이 해야 하는데 이런 관세 부담 때문에 반도체 사업에서 이익을 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러면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며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제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래요. 그러면 안 되지. 우리가 일본을 이겨야지. 내가 없애 주겠소'라고 했습니다. 저는 반가우면서도 내심 반신반의했어요. 이 제품에 대해 면세를 하면 다른 업계가 반발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전 대통령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1개월 후 프로젝션 얼라이너에 붙던 관세가 정말 없어졌습니다.”
삼성반도체는 반도체 전쟁의 승자가 되기 위해 난관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VLSI 반도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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