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중 ‘인강’, 내신은 ‘찍기’···공교육이 무너졌다[수능 30년]

김나연 기자 2023. 7. 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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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교육 무너뜨린 주범…대안은 없나
학생들 유불리 따라 ‘과목 편식’
고3 기말고사 땐 절반 찍고 자
집에서 학습하거나 자퇴 늘어
학교선 ‘대입’ 달려 놓지 못하는 수능
토론식 수업 등 공교육 혁신안
고1 ‘학생부 채우기용’ 그쳐
수시 여부 결정된 고2·3 외면
의대 노린 반수부터 재수까지
대학도 교육·학사 운영 골치
2022학년도 9월 모의평가에서 응시생들이 1교시 국어영역 시험을 치르고 있다. 경향신문 DB

“오늘 기말고사였는데 3학년들은 절반이 시험 시작하자마자 답안지 찍고 잤어요.” 대구에 있는 한 사립고등학교 2학년 김종혁군(17)은 지난 3일 기자와 통화하며 최근 학교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아직 2학년 1학기지만 정규수업 시간은 사설 교재를 활용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대비 문제풀이 수업으로 진행된다. 수시모집 지원을 포기한 친구들은 벌써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기도 한다. 고3이 되면 수업시간에 전자기기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 일도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2015 개정교육과정 총론에는 ‘토의·토론 학습을 활성화한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위해 시험이 끝난 학기 말에 형식적인 토론이나 발표 수업이 진행되는 게 전부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왜곡시키는 주범은 수능이다. 정해진 교육과정과 선택과목이 있지만 학교는 완전히 수능 중심으로 굴러간다. 고3 2학기 수업이 수능 대비 자습 위주로 운영된 것은 수십 년 된 관행이다. 2015 개정교육과정 도입 뒤 수능과 교실의 괴리가 커졌다. 2015 개정교육과정의 골자는 공통과목과 일반선택과목, 진로선택과목이다. 공통과목과 일반선택과목은 상대평가, 진로선택과목은 절대평가다. 수능에는 과학탐구를 제외하면 일반선택과목까지만 출제된다. 내신 절대평가, 수능 출제범위가 아닌 진로선택과목은 아예 학생들의 외면을 받는다.

일반선택과목 역시 흥미와 적성이 아니라 ‘수능 유불리’에 따라 선택한다. 학생들은 영어와 한국사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선택과목을 골라 수능에 응시한다. 탐구 영역에서는 사회탐구 9개와 과학탐구 8개 총 17개 과목 중 2개 과목을 선택해 치른다. 선택과목마다 난이도와 응시 집단 규모에 따라 표준점수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기피 선택과목’이 생겼다. 고난도로 출제되거나 응시 집단이 작아 표준점수를 얻기 불리한 세계사와 경제, 물리학과 화학 같은 과목은 응시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화학 과목을 가르치는 고삼곤 교사는 “학생들은 자신이 응시할 과목이 아니면 아예 신경을 안 쓰니 사회, 과학 과목들이 비인기 과목이 됐다”라며 “교사들이 (수업을 들어달라고) 사정해야 하는데, 그래도 학생들이 콧방귀 뀔까 말까 한다”라고 말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달 2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표선고를 방문해 과학 실험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표선고는 제주 유일의 국제 바칼로레아(IB) 디플로마 과정을 운영하는 공립고다. 연합뉴스

토론식 수업 등 공교육을 살리겠다며 도입되는 혁신 방안도 수능 앞에서는 무의미해진다. 이번 정부 들어 교육부는 토론식 수업과 논술형 평가가 이뤄지는 IB(국제 바칼로레아)를 전국으로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IB 교육이 운영되고 있는 제주 표선고에 방문해 “공교육 경쟁력 강화에 큰 의미가 있다”며 “전국적으로 확대되길 바란다”라고 했다. 그러나 IB 교육은 수능 체제하에서 효과가 미비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1학년 학생들은 ‘학생부 채우기용’ ‘수시 대비용’으로 참여하지만, 수시 지원 여부의 가닥이 잡히고 수능 준비가 더 중요한 2, 3학년의 참여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수능 준비에 몰두하겠다며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2023학년도 수능 지원자 중 검정고시 출신 등 기타 수험생 비율은 3.1%로, 해당 통계를 낸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능 지원자가 2014학년도 65만752명에서 2023학년도 50만8030명으로 줄었는데 검정고시 출신 지원자는 유의미하게 늘어났다. 특히 정부가 정시 비중을 확대한 2020학년도 수능부터 검정고시 출신 비율은 가파른 증가세에 들어섰다. 연간 57일까지 인정해주는 가정학습이나 학업중단숙려제 등을 활용해 학교에 오지 않고 수능을 준비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달 26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EBS 수능 연계 교재가 진열돼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도 학교가 수능을 놓을 수는 없다. 주요 대학에서 정시로 학생을 뽑는 비율이 절반에 가깝기 때문이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특혜 의혹을 계기로 마련된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방안’에 따라 서울 주요 16개 대학은 2023년까지 정시 비중을 40% 이상으로 확대했다. 2024학년도 대입에서 16개 대학의 정시 비중은 40.7%에 달한다. 수시 이월 인원을 고려하면 서울 주요 대학은 절반을 정시로 뽑는 셈이다. 특히 내신이 불리하지만 높은 수능 성적을 통해 대입에서 좋은 결과를 올려온 자사고는 정시 경쟁에서 더욱 손을 떼기 힘들다. 정시 확대에 따라 자사고의 경쟁률이 2019학년도 1.46대 1에서 지난해 1.82대 1로 상승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기도의 한 일반고에 다니는 3학년 한민영군(18)은 EBS 수능 연계교재인 ‘수능특강’으로 학교 수업을 듣는다. 주요 과목 중 교과서와 병행하는 과목은 수학뿐이다. 한군은 “기말고사가 끝나면 ‘수능완성’으로 수업할 것 같다”라면서도 “(수능 준비는) 학교 수업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점수 맞춰 입학하고 반수하는 학생들에 대학도 골머리

최근에는 수능으로 대학교육마저 무너지고 있다. 문·이과 통합수능으로 교차지원이 활성화한 데 이어 ‘의대 쏠림’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반수생이 늘어났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중도탈락자는 1874명으로, 1년 사이 40.2% 급증했다. 특히 이중 75.8%(1421명)가 자연계열 학생이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3개 대학의 자연계열 자퇴생은 반수 또는 재수를 통해 의·약학계열로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인문계도 이과 전향을 통해 의·약학계열 진학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 수업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조태형 기자

수능 점수에 맞춰 진로나 적성, 문·이과 계열 관계없이 상위권 대학 학과에 진학했다가 반수를 하는 학생들도 늘었다. 지난해 4월 입시기관 유웨이가 인문계열로 교차 지원한 이과생 45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반수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는 27.5%. ‘상황에 따라 재도전할 수도 있다’는 응답자는 28.4%를 차지했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차지원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합격을 목적으로 지원한 거지 학과를 진로에 맞춰 정한 게 아니기 때문에 중도탈락 위험군으로 관리한다”라며 “반수생 같은 중도탈락자들이 행정이나 비용, 교수의 학사지도에서 큰 부담을 주는 것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입학 전형자료인 수능과 현재 고교, 대학의 교육과정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수능은 대학에서 학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예언 타당도에 초점을 맞추는 시험인데, 수명을 다했다는 데 공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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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연 기자 n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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