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정치권력·도시 속에 놓인 우리들···붓질로 탐구하다
“서용선 예술세계 새롭게 보자” 기획
도시인물, 역사화, 자화상 등 초기~신작 대규모 전시
널찍한 전시실에 들어서자 큰 인물화의 빨간 눈이 관람객과 눈을 맞춘다. 투박한 몇개의 선, 묵직한 색감, 빨간 눈동자의 얼굴이다. 세상살이 온갖 풍파 속에 고단한 듯하지만 앙다문 입에서 물러서거나 굽히지 않겠다는 결기가 엿보인다. 성글게 표현된 듯해 오히려 더 오래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 서용선(72)의 ‘빨간 눈의 자화상’(2009)이다. 미술계에서 유독 회자되는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응축해 드러내는 것이지만 관람객 스스로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작품은 벽에 내건 기존 전시형식이 아니라 바닥에 입간판처럼 세워져 있어 색다르게 다가온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큰 주목을 받는 서 작가의 작품전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작품 70여점으로 구성된 대규모 개인전이다.
서 작가는 도시와 도시 속 사람들을 담아내며, 역사적 인물·현장 풍경을 담은 역사화, 자화상, 나무 입체작업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나같이 인간, 현재적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역사, 자연,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와 예술가로서 성찰의 성취물들이다.
50대 중반에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고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 그는 국내외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철암 그리기’ ‘가루개 프로젝트’ 등 끊임없는 연구와 시도,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고민해 후학들의 존경도 받는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예술여정을 기존과 다르게, 새롭게 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아트선재센터의 ‘연구조사(서베이)형 전시’다. 김장언 아트선재센터 관장은 “서 작가 작업에 대한 많은 평들이 서사적·구상적 해석으로 굳어진 면이 있다”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회화적 공간, 즉 서사적·구상적 측면을 넘어 형상적·감각적으로 살펴 새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는 “작품들 사이를 관람객이 오가며 보다 감각적인 감상, 작품들끼리 주고받는 관계도 살필 수 있도록 전시형식을 새로 시도했다”면서 “내용적으로는 서사성의 ‘도시-인간-역사(신화)-자연’ 축과 가시성·심미성 중심의 ‘선-면-형-색’ 축을 좌표로 삼아 작품들을 재조합해 ‘삶과 도시’ ‘삶과 정치’ ‘삶과 자연’의 3부로 나눠 구성했다”고 말했다.
‘삶과 도시’는 도시와 도시인들을 다룬 작품들로 꾸려졌다. 서 작가는 1980~1990년대 강남 확장 등 서울이란 도시와 도시민들의 급격한 물리적·정신적 변화를 주목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정치·사회적 환경의 급변, 거대하고 분주한 도시 속 사람들의 내면을 도시풍경 속 사람들의 표정·자세 등으로 치밀하게 담아냈다.
그의 작업은 서울을 넘어 뉴욕, 베를린, 베이징 등 세계 주요 도시들로 확장되고 있다. 전시에는 ‘숙대 입구 07:00-09:00’ ‘도시’, 미국 뉴욕에서 작업한 ‘브루클린’ 등이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1990년대는 많이 긴장한 채 도시를 본 것 같고 치밀한 면이 있다”며 “지금은 도시의 냄새까지 느끼려고 할 만큼 관조적”이라고 말했다.
2층 전시실의 ‘삶과 정치’에서는 역사와 정치, 삶과 죽음 등을 천착한 역사화·인물화·자화상들을 만난다. 서 작가는 “자화상은 그리는 순간 실패하는 그림”이라면서도 꾸준히 자화상을 그린다. 자신의 정체성·자의식을 다지고 드러내는 작업이자, 색·선·면으로 해체·재구성하는 회화적 실천의 방법론이며, 인간 탐구이기도 해서다.
서 작가의 역사화는 미술계 안팎에서 독보적이라 할 정도로 주목받는다. 1980년대 중반 단종의 비극이 서린 영월 청령포를 답사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업은 40여년째 이어진다.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계유정난을 비롯해 한국전쟁, 일제강점기, 동학농민운동 등 역사적 사건들을 꼼꼼한 연구와 비판적 주제의식, 독창적 표현으로 다룬다.
역사는 그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속에는 당대는 물론 시공을 초월해 사유할 만한 인간의 실존적 이야기들이 녹아있다고 믿어서다. 그의 역사 공부는 정치와 권력·전쟁 등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한편으론 정치권력에 희생된 이들을 향한 따뜻한 관심과 애도로 심화됐다.
이번 전시에는 ‘청령포’ 연작과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 유해를 그린 ‘이름 없는 죽음들’. 한국전쟁을 넘어 전쟁의 참혹함과 폐해를 담은 ‘폐허 1’ 남북 분단의 상처를 풍경속에 녹여낸 ‘두무진’, 이라크 전쟁을 다룬 ‘사막의 밤-포로들’ 등이 선보인다.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비밀리에 승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을 다룬 인물화도 있다.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인물들을 다룬 ‘정치인’(1984)도 눈길을 끈다. 독특한 표정과 자세뿐 아니라 지금도 검사·학자·방송인 등이 속속 정치인으로 변신한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극한적 노동과 치열한 삶이 펼쳐진 탄광촌 철암을 다룬 ‘철암’, 생존과 먹는 것의 의미를 되돌아보게하는 ‘밥먹기’ 등도 전시장에 나왔다.
서 작가는 “큐레이터와 전시를 준비하며 많은 생각을 한 작품전”이라며 “작품의 제작시기와 분위기, 붓 터치의 굵고 가는 정도 같은 묘한 차이들을 비교하며 관람하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고 밝혔다. 전시와 연계해 정영목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강(8월3일), 작가와의 대화(8월25일)도 예정됐다. 작가의 풍경화·인물화·나무조각들로 구성될 3부 ‘삶과 자연’은 9월15일 개막한다. 유료 관람이며 전시는 10월22일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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