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35. 호남성 풍수, 증국번과 좌종당
중국 남부 내륙에 자리한 호남성(湖南省)은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211,800㎢로 남한 면적의 2배가 넘는다. 그 중에서 필자가 다녀온 곳은 성도(省都)인 장사(長沙)를 중심으로 300여㎞의 여정이었다. 중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증국번과 좌종당의 선영을 간산하였다.
악록서원(嶽麓書院). 장사시 악록구 소재.
악록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악록서원은 중국 4대 서원중의 하나이다. 북송 초기(976년)에 창건한 이래로 무수한 인재를 배출했으니 증국번·좌종당 등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악록서원이란 현판과 현판 양쪽의 유초유재 어사위성(惟楚有材 於斯爲盛, 오직 초나라에만 인재가 나는데, 이곳에서 성했다)이란 대련이 호남인들의 자부심을 상징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건물들이 즐비하다. 건물들은 대부분 명당판안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 뒤쪽에는 단풍과 어울어져 자태를 뽐내는 애만정(愛晩亭)이 있고 그 뒤가 악록산이다. 악록산에는 근현대 인물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으니 반원(反袁, 반원세개)기치를 들었던 채악(蔡鍔, 1882~1916년)과 신해혁명 당시 손중산과 쌍벽을 이뤘던 황흥 (黃興, 1874~1916년)묘소가 대표적이다. 두 분 묘소는 모두 흉지에 자리한다.
호남성은 춘추전국시대 초(楚)에 속했다. 증국번의 고향을 찾아갔다.
백옥당(白玉堂). 쌍봉현 하엽진 천평촌(雙峰縣 荷葉鎭 天枰村) 소재. 성도(省都)인 장사(長沙)에서 남쪽으로 140여㎞ 내려가면 백옥당이 있다. 증국번 의 출생지임을 알리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증국번의 선조들은 수백 년간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1808년, 그의 증조는 66세에 10여명의 가솔을 이끌고 남쪽의 형양(衡陽)에서 이곳으로 이사했고, 1816년에 별세했다. 조부는 재산을 모으고 자식들에게 글공부를 시켰다. 1832년(道光12) 봄, 증인서(曾麟書, 증국번 부친)부자(父子)는 함께 향시(鄕試)를 보러 간다. 증인서는 17 번 도전 끝에 향시에 합격하니, 그의 나이 43세였고 증국번은 22세였다. 증씨 가문에서 수백년 이래 첫 번째 수재(秀才)가 탄생했고, 그 다음 해에는 증국번도 수재가 되고 27세에는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파천황(破天荒)의 경사였다.
백옥당. 증씨들은 훗날 9처10당이라 불릴 만큼 많은 저택들이 있었는데, 백옥당은 증국번이 태어나 진사가 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중청(中廳)과 동서청(東西廳)으로 나뉘어져 있는 방의 칸수는 48개이고, 건축면적은 4,000평방 미터에 달한다. 조부모와 부모님이 쓰던 방과 침대 등이 있고, 벽에는 증 (曾)씨 가문 선조들의 초상이 걸려있다. 동네 분의 안내를 따라 증국번 선영을 찾아갔다.
증국번 증조부 묘소. 마을 뒷산에 자리한다.
봉분 위에는 증경희(曾竟希)묘라고 안내판을 설치했다. 증조부 묘소는 닭이 쌀을 쪼아먹는 금계탁백미(金鷄啄白米)의 형국으로, 혈성(穴星)은 닭의 모습이고, 묘소는 닭의 머리에 모셨다는 것이다. 증조가 별세했을 때 유일한 증손은 5살의 증국번이었으니, 증국번이 증조부 명당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 전대미문의 출세를 했다고 한다. 당시(2011년)는 필자의 맥로 이론이 정립이 안되어 명당의 풍수파워를 확인할 수 없었다.
증국번 묘소. 장사시 악록구 동계사 뒤의 복룡산상.
증국번 (曾國藩, 1811~1872) 증국번은 1838년(도광18년)에 진사가 된 이후 중앙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다. 1852년에 모친의 별세로 고향에서 3년 상을 치르던 중, 광동(廣東)에서 궐기한 홍수전(洪秀全)의 태평군이 장사(長沙)까지 공격한다. 함풍제(咸豐帝)의 명을 받은 증국번은 고향에서 상군(湘軍,호남성 의병)을 조직하고 제자인 이홍장(李鴻章)과 좌종당(左宗棠)을 지휘관으로 발탁한다. 만주족인 청조(淸朝)는 한족에게 군권을 맡긴 적이 없었으나, 태평군을 맞서 싸우는 증국번에게 양강총독을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공방 끝인 1864년에 태평군의 수도인 남경을 함락시켰다. 1868년에는 한족으로는 최초로 지방관 최고위직인 직례총 독에 임명된다. 같은 해 양강총독이 암살되자 직례총독을 이홍장에게 양보하고 양강 총독에 복귀한다. 1872년, 재직 중 사망하니 향년 62세였다. 증국번은 청조의 여러 분야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신식윤선(輪船) 제조, 공병(工兵)학 당 설립, 다량의 외국서적 번역, 미국으로 유학생 파견 등을 추진했으니 양무운동의 시작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청사고(淸史稿)』에는 만청사대명신(晩淸四大名臣)을 꼽지만 중흥이래의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증국번 뿐이다(中興以來, 一人而已)라고 기록했다.
40회절 이상의 천하대지급 명당에 모셨다.
증국번이 사망하자 조정은 3일간 조정을 파하고, 태사(太傅)라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내린다. 남경(南京)에서 출발한 증국번의 운구가 장사에 도착하니 때는 혹서(酷暑)기였다. 임시로 장사 남문 밖의 금분령(金盆嶺)에 안장한다. 이후 증국번의 아들과 동생들이 찾아낸 명당이 바로 동계사(桐溪寺)가 있는 복룡산(伏龍山) 이곳이다. 2년 뒤에 사망한 구양(歐陽)부인과 합장으로 모셨다. 8년 만에 다시 와보니 한적했던 시골 풍경은 사라지고 개발로 인하여 주변이 많이 바뀌었다. 2011년, 북경의 서점 2,3곳을 들린 적이 있다. 서가에는 온통 증국번 관련 서적이 넘쳐났다. 증국번 탄생 20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연구하는 대상이란 증거이다. 관직에 나가려면 증국번을 배워야 하고, 장사를 하려면 호설암을 배워야 한다.(做官 要學曾国藩,经商要學胡雪岩)는 말이 있다. 증국번은 자녀교육을 중시했는데, 아우와 자식들에게 보낸 수 천통의 편지가 훗날 증국번가서(曾國藩家書)로 편집되었다. 장개석과 모택동도 평생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증국번이 연구 대상인 것은 그의 학문적 깊이와 관료서의 처세가 남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후손들이 한결같이 잘 되었다는 점이다. 증국번이 세상을 떠난 지 150여 년이 지났고 증씨 후손들은 250여 명이 넘는데 단 한 사람도 잘못된 사람이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후손들의 번성은 대명당에 모신 증국번 묘소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다.
증국번의 차남 증기택(曾紀澤)은 주영, 주프랑스, 주러시아 대사를 역임했다.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서 이리(伊犁)지방의 영토를 확보한 것이 주요한 치적이다. 증국번의 삼남 증기홍(曾紀鴻)은 저명한 수학자로서 이름을 남겼다. 증국번의 동생 증국전(曾国筌)의 증손녀인 증헌식(曾憲植)은 섭검영(葉劍英)과 결혼하여 공산혁명에 투신하였다. 증국번의 고택들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섭검영 덕분이라는 말이 있다.
유장(柳莊). 상음현 장수진 순산촌(湘阴县 樟树镇 巡山村)소재.
1843년, 좌종당은 학생들을 가르치면 번 돈으로 땅을 사서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다. 전통적인 민가구조로 집 뒤로는 푸른 언덕이 있고 문 앞에는 맑은 연못이 있다. 좌종당은 버드나무의 꺾이지 않는 성격을 좋아하여 자신의 집을 유장이라 불렀다.
유장의 문앞에서
좌종당은 14년간 이곳에 거주하면서 역사·지리·병법·시사뿐만 아니라 농업에 이르기 까지 만권을 읽어(讀破萬卷) 마음속에는 천하를 걱정하며 훗날 역사에 남을 인물로서의 기초를 다진 곳이다.
좌종당 묘소. 장사시 도마진 백죽촌 소재.
증국번 묘에서 동쪽으로 30㎞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좌종당(左宗棠, 1812 ~ 1885년) 좌종당은 장사(長沙)에서 태어났으니 증국번과 동향인 셈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스무 살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이후 6년동안 세 차례의 회시에 응했으나 끝내 진사(進士)는 되지못했다. 좌종당을 만난 임칙서(林則徐, 1785~1850년)는 “절세의 기재”라고 극찬하며 자신이 신강(新疆)에서 정리한 귀중한 자료들을 넘겨준다. 훗날 신강수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1852년, 증국번이 함풍제에게 중용되어 호남에서 병사를 훈련시키고 있을 때, 좌종당은 장량기(張亮基)의 막료(참모)가 된다. 증국번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세 사람이 토론을 벌이면 좌종당의 탁월한 식견과 거침없는 언변은 누가 주장(主將)이고 누가 참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1856년, 좌종당은 증국번의 추천으로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었다.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상군(湘軍)이 1860년에 승전모드로 전환하자 조정은 증국번을 양강총독으로 승진시키고 강남의 군무(軍務)를 총괄하게 하고 좌종당을 그의 수하로 배치한다. 증국번 은 좌종당에게 초군(楚军)을 만들어 강서(江西)와 안휘(安徽)에 가서 전투를 치르도록 한다. 1861년 좌종당이 절강(浙江)으로 진군하니 증국번은 그를 절강순무에 추천하여 윤허를 받았다. 좌종당도 비로써 봉강대리(封疆大吏, 요즘 기준 省委書記 겸 軍區 제1서기)가 되었다.
태평군의 천경(天京, 남경)을 함락한 후, 증국번은 화북에서 일어난 염군(捻軍 )의 반란을 진압하고 양강총독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좌종당은 증국번 보다 13년을 더 살았는데, 그것은 신강수복을 위한 여생이었다.
서역(西域)이라 불리던 신강은 실크로드의 경유지였고 서방 교역의 연결고리였다. 청조는 강건(康乾)성세 시기에 이 지역을 평정하고 신강(新疆)이라 하였다. 그러나 청말에 이르자 태평군의 난 등으로 조정의 장악력이 떨어지자 도처에서 반란과 이탈세력이 늘어갔다. 이 틈에 세력을 키운 인물이 야쿱 벡(Yaqub Beg)이다. 그는 1870년에 는 돈황과 천산산맥 너머 우루무치까지 점령했다. 그리하여 신강은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 청조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홍장의 해방(海防)론과 서역이 중요하다는 좌종당의 새방(塞防)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좌종당은 여러 번의 서정(西征)상소를 올리고 마침내 자희태후(서태후)의 윤허를 받는다. 조정이 지급한 군비가 부족하자 오랜 친구인 호설암(胡雪岩)을 통하여 군자금을 마련한다.
그는 서양의 최신식 무기를 구입하고, 귀향을 원하는 병사들은 귀가시킨다. 정예화된 군대로 진공하여 10개월 만에 신강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야콥 벡의 폭정에 반기를 든 백성들의 투항도 한몫했다. 다만, 이리(伊犁)지역은 러시아가 외교에 어두운 청조 의 숭후(崇厚)를 농락하며 눌러앉았다. 이리를 삼키겠다는 속셈이었다. 담판소식이 전 해지자 조정은 들끓었고 좌종당은 분노했다. 청은 증국번의 아들인 증기택을 전권대표로 보내 재협상을 하게 하는 한편 좌종당은 관(棺)을 메고 출정하여 결사항전의 무장 엄호에 나섰다. 좌종당의 나이 68세였다. 좌종당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영토의 1/6에 해당하는 신강은 중국 영토가 아니였지도 모른다. 이후 군기대신, 양강총독, 동각대학사 등의 요직을 지내고 1885년 세상을 떠났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은 좌종당을 만주족을 도와 태평군을 진압한 한간(漢奸)이라며 그의 유해를 꺼내 없애버렸다. 지금의 묘소는 1986년 등소평의 지시로 봉분만 복원한 것이다. 그가 청조와 중국에 기여한 공로에 비하면 후손들의 상황이 쓸쓸한 것은 흉지에 자리한 좌종당 묘소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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