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과 5대5레벨 돼야 월클!" 신유빈은 '인생랭킹'세계9위에 웃지 않았다[진심인터뷰]
"첫 경기 때 '와, 큰일 났다'는 생각뿐이었어요."
18일 인천 원당 대한항공 여자탁구단 훈련장에서 만난 '세계랭킹 9위' 신유빈(19·대한항공)은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지난 5월 남아공 더반세계탁구선수권 여자복식에서 은메달을 딴 직후 6~7월 월드테이블테니스(WTT) 라고스(나이지리아), 튀니스(튀니지), 자그레브(크로아티아), 류블랴나(슬로베니아) 대회에 연달아 나섰다. 폭풍 일정 속에 라고스에서 '중국 신성' 리아 커를 꺾고 단·복식 2관왕에 오르고 튀니스에서 2연속 단식 결승행을 이루고, 라고스, 자그레브 대회 우승 포함 4연속 복식 4강에 오르며 7월 생애 최고 랭킹을 찍은 에이스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첫 경기'를 꼽았다. 대만 리유준과의 32강전, 2게임을 먼저 내주고 듀스 접전끝 3게임을 따낸 후 3대2로 신승한 경기, 팬도 미디어도 기억하지 않는 그 경기였다. '중국 신예' 리아 커를 2연속으로 꺾고, '일본 에이스' 나가사키 미유를 돌려세운 경기, '하리모토 여동생' 미와와의 첫 결승, '세계 1위' 쑨잉샤와의 맞대결이 예상 답변이었는데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유를 물었다. "경기 내용이 최악이었거든요. '내가 그동안 어떤 탁구를 쳐온 거지? 큰일 났다. 이렇게 치면 답이 없다. 위에 있는 선수들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신유빈은 결과가 아닌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계선수권에서 계속 이기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걸 놓치고 있었어요. 첫 경기 후 조언래 코치님과 미팅을 두세 시간 했어요. 성찰의 시간이랄까. 탁구는 몸, 멘탈, 기술, 3가지가 함께 가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힘들다 보니 기술을 채울 공간이 없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신유빈은 심기일전했고 결국 그 대회 정상에 섰다. "첫 경기를 엉망으로 하고 나서 각성했죠. 그 뒤로 더 최악은 없었어요. 조금씩 경기력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열악한 환경, 잦은 이동, 배앓이를 해가며 한달새 아프리카, 유럽 4대회를 도는 일정은 쉽지 않은 도전. 하지만 무한 긍정의 신유빈은 "세계선수권 끝나고 바로 4개 대회가 이어진다는 걸 알고 미리 마음을 잡았죠. 겁먹었던 것보단 4대회 연속 여정이 행복했어요. 배운 것도 정말 많아요"라고 했다. "근데요, '행복하네''재미있네' 하고 다니다 슬로베니아 마지막 경기 끝나곤 저도 모르게 막 울었어요. 좀 힘들었었나 봐요" 했다. "자고 일어나서 경기하고 연구하고 또 경기하고 자고 또 연구하고… 때론 머리가 터질 것같았지만 많은 걸 배웠어요. 선수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는데 제일 많은 걸 배웠어요"라며 웃었다.
해맑은 미소가 넘치는 그녀지만 2021년 휴스턴세계선수권 손목 골절 부상 이후 1년 반 가까이 실전에 나서지 못하면서 맘고생이 깊었다. "사실 많이 무서웠거든요. 첨엔 탁구만 다시 치면 행복하겠다 했는데 내 맘대로 안됐어요. 흐름을 못읽겠더라고요. 무서워서 공 맞추기가 힘들었어요"라고 했다. "세계선수권도 가서도 '또 다치면 어쩌지' 무서웠는데 1회전 이기고 나서 '2년 전보다 괜찮네' 생각이 들면서 신이 났어요.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고, 소풍 전날처럼 다시 설레기 시작했어요."
시련을 이겨낸 19세 탁구소녀에게 세계선수권 여자복식 은메달에 이어 생애 최고 랭킹 '세계 9위'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톱10중 1~6위는 중국(쑨잉샤, 첸멍, 왕만위, 왕이디, 첸시앙통, 치안티아니), 7~8위는 일본(이토 미마, 하야타 히나) 그리고 9위가 대한민국 신유빈이다.
주변의 찬사에도 신유빈은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지금 랭킹은 계속 바뀌는 거고 랭킹을 신경쓰다 보면 기술을 놓칠 것같아요. 제 실력을 탄탄하게 만들면 랭킹은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10위 내에 중국선수 6명, 일본 선수 2명 단단한 벽이 있어요. 저는 이 벽을 계속 두드려야죠. '똑,똑, 저 들어가도 될까요?' 더 열심히 해야 해요."
신유빈은 랭킹은 랭킹일 뿐, '월드클래스'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월클'이란 무엇일까. "모든 박자, 모든 공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해요. 게임수도 좋아져야 하고, 공도 더 정확하게, 내가 보내고 싶은 방향으로 모든 공을 보낼 수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전체적으로 레벨이 올라가야 해요. 모든 면에서 세계 1위(쑨잉샤)만큼 칠 수 있어야 '월클'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아요"라고 또렷하게 답했다. 이어 "하지만 중국 톱랭커들이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번 이기는 것보다 같은 실력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5대5로 부딪칠 수 있는 실력을 쌓고 싶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항공 탁구훈련장 한켠엔 1973년 사라예보세계선수권 금메달 김순옥부터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김경아, 당예서까지 대한항공 출신 여자탁구 레전드들의 '명예의 전당'이 있다. 2023년 '남아공세계선수권 여자복식' 은메달리스트 신유빈이 레전드 선배들 옆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됐다. 19세 에이스의 세계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10년 뒤에 선수생활을 돌아봤을 때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일이 많겠지만 내 탁구에 집중하면서 유연하게 잘 이겨낼 거예요. 더 단단한 선수가 되고 싶어요"라는 각오를 전했다.
그녀의 폭풍 일정은 다시 시작된다. WTT컨텐더 리마(페루 7월31일~8월6일 ), 리우데자네이루(브라질 8월7~13일), 평창아시아탁구선수권(9월3~10일), 항저우아시안게임(9월23일~10월8일)까지. 항저우아시안게임 이야기에 신유빈은 또 한번 "재밌겠다"며 눈을 반짝였다. "아시안게임 이전까지 실전을 연습처럼 하면서 그 속에서 계속 이겨나가고 싶어요. 바쁜 일정 속에 졌다고 좌절할 시간도, 이겼다고 좋아할 시간도 없어요. 실전을 훈련처럼 할 거예요. 이제 마음 속에 다시 기술의 공간이 생겼어요. 경기 때 드라이브, 스윙, 움직임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보고 있어요. 당장의 결과가 목표가 아니라 발전하는 게 목표니까. 모든 대회에서 좋은 내용의 탁구를 치는 게 제일 간절해요. 그러면 메달은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메달 색은 밝을수록 좋겠죠?"라며 생긋 웃었다.
세계선수권 메달 포상금 1000만원 전액을 월드비전에 기꺼이 내놓은 '기부천사' 신유빈은 언제나처럼 팬들을 향한 감사와 나눔의 약속도 잊지 않았다. "팬들께 너무 감사해요. 저는 기쁨과 감동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운동선수의 특권이고, 일반학생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이들과 오래 나누고 싶어요. 기부도 더 열심히 할 거예요. 기부는 제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강력한 동기부여예요. 탁구를 더 잘해서, 더 많이 기부하고 싶어요."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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